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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Nov 10. 2019

구남친의 전화

그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나에게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고. 

전남친에게 전화가 온 적이 있다. 거의 1년 반만의 통화였다. 헤어지고 세 달 후엔가 한번 전화가 온 이후에 처음이었다. 어떤 연애든 안 그렇겠냐만은 그는 나에게 특히 의미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2년이 넘게 연애를 못하고 있다. 그를 잊지 못해서는 아니다. 그와의 연애가 후유증을 남긴 것도 아니다. 그와의 연애로 나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만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회사는 뭐같이 힘들었고, 연애를 도피처로 삼고 싶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너무 숙맥이라 사귈 수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그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넘어가고 말았다. 스무 살 첫사랑에게서 보았던 그 눈빛을 이십 대 후반에 보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내가 첫사랑이자 첫 여자 친구였다. 

그가 얼마나 숙맥이었고, 얼마나 고구마 답답이었는지를 굳이 말하진 않겠다. 나도 수많은 단점으로 점철된 인간이기에. 그와 사귈 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맞지 않는 사람들, 맞지 않는 조직, 맞지 않는 일. 안 맞는 옷을 입고 꾸역꾸역 영혼 없이 회사만 나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회사라는 안정성이 주는 메리트가 다른 모든 걸 이길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를 만나면 늘 징징댔다. 짜증도 많이 냈다. 그는 그 모든 불평불만을 단 한 번 싫은 내색도 없이 들어주었다. 

그에게 늘 연애를 못한다고 구박했지만 헤어지고서야 알았다. 진짜 연애 고자는 나였다. 그가 연애를 하는 데에는 서툴렀을지 몰라도 마음을 주는 데는 나보다 한수 위였다. 그가 준 마음들이 새록새록 등장했다. 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에게 받은 마음들을 새겨보다 문득 깨달았다. 꽁으로 받은 마음은 이렇게 티가 나는구나, 하고. 그 이후로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 두려움이 생겼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인생을 만만하게 살았는지, 연애를 쉽게 생각했는지, 이전 애인들이 나에게 주었던 마음의 가치를 보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헤어짐이 헤어지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별이라는 게 이렇게 잔잔하게, 오래도 힘들 수 있구나. 폭풍 같은 눈물 없이도 이토록 아플 수 있구나. 때문에 결코 쉽게 연애를 시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힘든 이별을 또 겪을 거라면 시작하지 않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도 몇 번인가 전화를 하고 싶었다.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내 곁에 있어주어서 고마웠다고. 그 모든 걸 다 너에게 풀어서 미안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시 시작할 게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결국 하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얼마 전 나를 닮은 사람을 보았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했다. 신기하게도 그때 그에게 느꼈던 포근함, 따뜻함, 귀여움 등이 모두 느껴졌다. 
당시 준비 중이던 시험에 대해 말하자 그는 응원과 함께 시험이 끝나고 한 번 보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가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로 남았는지, 그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운지 모두 말했다. 그와 헤어지고 연애의 무거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마음이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알아버린 지금, 예전처럼 가볍게 다시 그와 시작할 수 없었다. 다시 전화하지 않은 이유도 그와 다시 시작할 게 아니라면 잘 살고 있는 사람을 흔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헤어지고도 이토록 애틋하고 슬픈 마음이 드는 사람은 그 뿐이다. 그렇게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밥을 먹고 헤어지는 그 순간에,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결국 또다시 헤어짐을 겪는 것일 뿐이다. 그 괴로운 순간을 또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또 보면 되지 않냐고 했지만 그런 모호한 관계는 싫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헤어지고 친구로 남기도 하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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