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핀 민들레를 본다. 예전엔 내게 있어 민들레는 내가 좋아하는 꽃, 땅에 붙어 질긴 생명을 지닌 존재였다. 지금은 민들레를 바라볼 때면 아기의 통통한 손가락이, 오물거리는 입으로 "ㅇ을레~!" 라고 외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내게 민들레는 대체 불가한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었다. 철썩이는 파도에 아기의 "철썩철썩" 하며 파도의 몸짓을 흉내 내는 손이 담긴다. 지나가는 덤프트럭과 굴착기는.. 예전에 주위에 중장비들이 그렇게 많이 존재했던가? 새삼 깨닫는다. 내겐 아무 의미가 없었던, 하등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존재,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그것들의 의미를 아기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꽃
그렇게 일상적이었던 모든 사물들에 하나씩 의미가 덧대어져 세상 모든 것들이 내게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세상은 사실 어떤 맥락 속에서 의미가 담긴 집합체라고, 무언가는 존재하지만 그 무언가는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의미가 있다고. 그래서 세상이, 삶이 의미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맥락은 조금씩 바뀌고 지워지고 대체되기도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내가 여든이 되어도 지금의 민들레를, 그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너의 얼굴과 손과 목소리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