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지만 들뜬 하루였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맛탱이 갔던 다섯 살배기 노트북이 소생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여러모로 애증 어린 녀석이다. 일 년에 꼭 한 번은 이렇게 말썽을 부린다. 여자친구는 녀석을 두고 좀비 노트북이라 부른다. 저세상으로 갈 듯 말 듯 어떻게든 생을 연장해서다. 맞는 말이다. 내겐 생사를 같이한 놈인 것을. 얘한테 그동안 쓴 수리비만 50만 원은 족히 넘을 거다. 기계를 막 쓰는 성정인지라 상판 여기저기가 뭉개진 건 예사인 데다 키보드를 감싸는 덮개 일부분은 아예 깨져버린 탓에 어딘지 노출 콘크리트를 닮았다. 헐겁다.
하판을 연결하는 별 나사 하나는 어딘가로 뒹-굴 굴러 사라진 지 오래. 한 달에 한 번은 나사들이 춤추며 외출하려는 모양새를 띤다. 분주하다. 드라이버로 매번 조여줘야 한다. 도망가지 않도록. 그러고 보니 한 자리가 비었다. 어쩐지 귀찮다. 일단은 내버려 둔다. 전에 쓰던 맥북에서 나사 하나를 용병으로 데려오면 되기도 하고. 사실 전적이 있다. 이미 한 군데는 그렇게 메꿨다. 작은 구멍에 맞지도 않는 놈을 강제로 끼워 넣었다. 미끄러움을 방지하는 고무 패킹이 못내 답답했는지 녀석이 옷 하나를 벗어던졌다. 반항인가.
충전이 되지 않았다. 충전기를 빼면 쓸 수가 없었다. 꺼졌다. 지난 일 년간 녀석의 배터리 상태는 1%. 용케도 충전기를 꽂고 쓰면 잠들지 않았다. 퍼센티지가 올라가진 않았지만. 재밌는 녀석이다. 오늘 이 녀석을 친히 모시러 독산역에 가야 했다. 그전에 기착지가 있었다. 새로 산 노트북 상태가 왠지 좋지 않아서 삼각지역 근처에 있는 브랜드 센터에 들러야 했다. 이가 아니면 잇몸이라고, 핸드폰으로 글을 써보려 했건만 영 진척이 되지 않아 별수 없이 산 친구다. 출생신고한 지 이 주가 채 안 된 갓난아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폰이란 물건은 감칠맛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타-다다닥 치는 맛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당최 글이 써지질 않는 거다. 난감한 일이다. 부지런히 글 좀 꾸준히 쓰기로 맘먹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시점에 노트북이 고장 났으니. 결국 고민하다가 신입 녀석을 9월 30일 주문했다. 하루를 더 고민하다 영입을 결심했다. 포노 사피엔스라는 말이 나한테는 와닿지 않았다. 노트북이 필요했다. 결제. 10월 1일 새벽 1시 44분.
너무 큰 지출을 한 거 아닌가, 속이 쓰렸지만 영롱한 날것의 자태를 맞이하니 사랑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왔다. 흠뻑 빠지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 친구 문제가 있었다. 이어폰을 꽂으면 지지직대는 소리가 났다. 유튜브 좀 보려 영상을 재생하면 블루스크린이 떴다. 원 참, 새로 산 녀석까지 이 모양이라니. 교환할 수 있다면 바꿔야겠다 다짐했다. 역시나 오늘 판정서를 받아보니 초기 불량이었다. 그래픽카드가 문제란다. 더 정들기 전에 이별을 결심하길 잘했다.
사실 원래 노트북 녀석도 초장부터 문제가 많았다. 다만 그때 난 반품과 교환은 고려대상에 두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애초에 기계에도 뽑기 운이 따른다는 사전지식 또한 내게 없었다. 기계치였다. 윈도우도 혼자 못 깔던 모지리가 노트북이 양품인지 불량인지 알게 뭔가. 쓰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그냥 품어보자 생각했다. 또 어딘가 비실대는 게 날 닮은 듯했다. 갓 병마를 극복했을 시점이다. 그때 녀석을 샀다. 2015년 8월이었다. 신기하게도 쓰다 보니 괜찮아졌다. 나도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우린 동지다.
“자주 찾아주셔서 깎아드렸어요.” 메인보드를 갈았는데 8만 원만 달라신다. 날 기억하고 계시네. 아니, 녀석을 알고 있으신 건가. 내가 녀석에게 든 정만큼이나 엔지니어님도 녀석이 익숙한가 싶다. 뭐, 다행이다. 삼 주 만에 만난 녀석의 키보드 감이 참으로 아늑하다. 역시 케케묵은 친구는 온도마저 남다르구나. 오랜만이다. 잘 왔다 이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