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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Mar 29. 2024

서문 2

서문 2. 유니폼

일이란 뭘까. 나를 감추면서 드러내주는 일.


멀뚱히 서 있는 일을 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 자리만 지키면 되는 일.

참나. 이게 무슨 일이야.


하루 종일 내 자리에 앉아있는 일도 오래 했다. 하루 9시간 내 직분을 다 하기 위해 아침에 밥 먹고 밤에 씻고 잠드는 것도 다 일이 되어버리고 일 외의 삶은 자투리가 되어 희미해졌다.

일이란 게 뭐지? 나를 지우는 건가?


일본에서 그려온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펼쳐 보았다.

매일 시곗바늘 사이를 묵묵히 견디며 자신을 유니폼 아래에 감춘 사람들. 그러나 행인이 바람처럼 밀려다니는 조용한 도시에서 유니폼은 그 한 사람을 공중에 들어 올려 도시에 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여기서 일을 하고 있다!

당신들이 정처 없이 흐르는 여기서,

이 사람은 지금.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기로 하고 5년째, 나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눈곱 떼고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시작한다. 새벽 4시~10시까지 일하고, 점심부터 밤까지는 진짜 내 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내 작업시간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만 하는 일을 찾다 보니 일이 자꾸 새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시간과 돈을 쪼개 쓸 때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돈 버는 일을 일이라고 해야 하나, 내 작업을 일이라고 해야 하나. 돈 못 버는 이 일은 일인가, 취미인가. 일은 일인데 수입은 없으니, 직업이라고는 못 하려나. 이 일이든 저 일이든 아무튼 종일 앉아서 일만 하다가 진짜 내 삶은 언제 누리나.


더 이상 내 자리를 향해 집을 나서지도, 그 자리에 맞는 옷을 갖춰 입지도 않는 지금. 그러나 여전히 내게 수입을 가져다주는 일을 그저 창작을 위한 생계형 아르바이트일 뿐이라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돈이 많으면 쉬운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나에게, 제복의 나라는 날 붙잡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봐! 진짜 가짜가 어딨어? 이게 네가 아니면 누군데? 지금의 네가 바로 너야!”


돈은 수단일지 몰라도 일은 수단이 될 수 없다. 일에 바치는 내 전 생애가 수단이 되면 나도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니 존재 이유를 밖에서 가져와 붙이지 않아도 된다. 돈 버는 일에도, 시간을 쓰는 일에도, 너 자신에게도.


일이라는 말로 가려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알아봐 주고 싶어졌다. 그것이 나를 드러내 주길 바라면서. 그래서 이 책을 만들었다.


이어지는 글의 순서


서문 : 일하는 사람


<도쿄>

도쿄역. 기관사 : 신호를 만들다

신주쿠역. 경찰 : 읽다

오모테산도역.. 초등학생 : 짊어지다

시부야역. 버스기사 : 보다

황궁. 시각장애인 가이드러너 : 돌파하다


이후 교토와 오사카 편이 이어집니다.


2024년 2월.

그림책 작업모임 [작은 zine] 더미북 전시

@art story ZARI ,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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