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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착각’이라는 제목에 나만 꽂혔을 리 없다. 비상계엄을 통한 내란 시도가 너무 명확해서 논란의 여지도 없을 줄 알았다. 이후 거대한 집단 착각을 잇달아 목격하고 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이 꿈틀댔다.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 휩싸여 신뢰를 잃은 사회. 서로 집단 착각이라고 공격하는 사회가 지속 가능할까?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토드 로즈는 집단 지성이 집단 무지성으로 전락하는 시대,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절절하게 정리했다. 사례가 이렇게 많다니 새삼스럽지만, 희망은 또 어디에서 붙잡아야 할지 알려준다.
집단 착각, 인간이 원래 그렇다
일단 집단 착각에 빠진 이들을 너무 뭐라 하지 말자. 우리 인간이 문제다. 아니, 뇌가 문제다. 겁나 바쁜 뇌는 어지간한 일은 자율주행 모드 마냥 에너지를 아낀다.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버려야할지 가늠하기 위해 ‘무의식적 인지적 지름길’에 의존한다. 집단 착각은 일단 ‘전문가’, ‘리더’를 추종하면서 일어난다. 그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거다.
“스스로 판단할 만큼 충분하고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확신을 품지 못할 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추종할 때 우리는 따라쟁이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검증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특히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우리보다 더 나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지표로 삼으려 든다.”
종종 다수가 아니라 목청 큰 소수에 이끌려, 그들을 다수로 착각하고 따라쟁이가 되어 침묵하거나 떠든다. 권위에도 당연히 약하다. 1996년 뉴욕대 물리학과 교수 앨런 D. 소칼은 ‘경계의 침범 : 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문화 연구 학술지에 발표했다. 6명의 편집자가 검토해서 게재했지만 사실 학술 용어로 뒤범벅된 혼란스러운 헛소리였다. 소칼은 이 사기극을 통해 학술 저작물 체계가 갖는 허점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밝혔다. 권위 있는 ‘직함’에 전문가들도 홀라당 넘어가는 과정에서 검증은 없었다.
인기 없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꺼리는 마음은 인기 있는 쪽을 지지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여론조사에서 1등 하는 후보를 더 지지하게 되는 방식이다. 명태균의 여론 조작 핵심이 윤석열을 더 인기 있는 후보로 만들어줬고, 이게 진짜 통한다는 얘기다. 저자는 “여론조사와 언론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상 작동하는 과정에 막강한 힘을 행사한다”고 했다. 우르르 몰려가는 이 습성, 인간은 원래 그렇다니까!
끼리끼리 코드 맞추는 이유
최상목 국무총리 권한 대행은 대체 왜 저럴까? 기재부 관료들은 다 저런 걸까? 역시 ‘집단’이 문제다. 최 권한 대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만의 리그’ 여론이다. 국민보다 주류 엘리트 집단 눈치 보는게 먼저란 얘기다. 교인이라면 교회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이른바 이대남에게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 막강할 수 있다.
“우리는 친밀감을 깊게 느끼는 집단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신경을 쓴다. ‘귀속집단(In-group)’의 칭찬이나 비난이 가장 큰 관건인 것이다. 우리가 ‘나의 부족’이라고 느끼는 집단은 우리의 종교, 정치, 국적, 혹은 혈연관계 등을 공유하는 관계일 것이다. 이같은 귀속집단에 확실히 속해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더 행복하고, 안전하며,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쓸데 없이 바른 말 해서, 괜한 의문을 제기해서, 분위기에 휩쓸리는 대신 튀는 행동으로 소속 집단에서 밀려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버티려 애쓰다보면 길을 잃는다.
”사회적 추방에 대한 우리의 자동화된 반응 기제는 너무도 강력한 나머지, 우리는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위협을 느낄 때면 또 다른 막강한 심리적 기제를 작동시킨다. 내집단과 외집단의 경계마저 흐려지는 것이다. 공포, 자기 의심, 심리적 고통에 짓눌린 우리는 우리를 배제한 자가 친구인지 적인지도 잊어버리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누구나 집단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다른 이들 눈치 보는 건 사회적 인간의 본성이다. 1960년대 사회심리학자 존 달리와 비브 라테네가 콜롬비아대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발생했을 때, 혼자 있는 경우와 여럿이 있는 경우 대응이 달랐다. 연기를 목격한 뒤 혼자 있던 이들 75%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제를 알리러 갔다. 하지만 연기에도 불구,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풍경이 연출되자 문제를 알리러 간 사람이 38%에 머물렀다.
집단 착각이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 낸 대표 상품은 생수. 미국의 수돗물 99%는 음용 가능하며, 판매 생수의 절반 이상이 약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수돗물이란다. 생수는 수돗물보다 2000배 비싸고, 2000배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지만 2019년 미국인들은 1900억 리터의 생수를 마셨다. 저자는 이같은 현상이 투기 원조 ‘튤립 광란’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누구든 집단 착각에 빠질 수 있고, 그 편이 더 편안하다. 하지만 집단 착각은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치명적 해악을 끼친다. 저자는 “한 세대의 집단 착각이 다음 세대의 개인적 신념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언급한다.
”여러분과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집단 착각에 휩쓸려 다니는 중이다. 우리는 순응과 자기검열의 덫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빨려들고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에 힘입어 자기 검열이라는 우리의 나쁜 본성은 더욱 급격하게 전이되는 중이다.”
러시아 가짜계정들은 “분노를 자극하고, 저항 시위를 촉발하며, 미국인들을 서로 멀어지게 만들고, 공적 제도에 대한 불신을 퍼뜨리는” 일을 했다고 미국 상원 정보 특별위원회가 밝혔다. 우리 마음 속 편견을 증폭시키는 소셜미디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왜곡된 착각을 만들어내고 키우는데 기여하게 된다.
집단 착각에서 빠져나오는 비법
가장 중요한 건 질문이다. “왜?” 우리는 종종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판단한다. 그 판단은 연쇄작용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왜?”라는 질문 하나가 그런 과정을 효과적으로 차단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의 바탕에 깔린 이유를 드러내고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가치관 및 우선순위와 부합하는지, 더 나아가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지 등에 대해서도 따져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정체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각자 속한 주류 집단, 학교, 교회, 커뮤니티 등에서 한쪽 이야기만 듣기보다 정체성의 복잡도를 높여야 한다는 얘기다. 다양한 집단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다못해 독서모임이라든지, 운동 등 다른 취미생활 그룹, 이웃 모임 등을 늘려서 한 가지 주장에만 매달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우리 진영은 늘 옳고 저들은 틀렸다? 상대를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되는 일은 없다. 저들은 ‘닫힌 마음의’, ‘지적이지 않은’, ‘게으른’, ‘애국심 없는’ 존재라고,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서로를 생각한다. 역시 집단 착각이란다. 으르렁거리는 이들은 서로 닮아 있다. ‘현저한 공유 가치’에 공통된 믿음이 있고, 같은 희망과 우선순위를 갖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미래를 위해 개인의 권리, 양질의 건강 보험, 지도자의 액임, 이웃의 안전, 편견 없는 형사 사법 체제, 평등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보편적이다. 사람들의 최상위권 20개 가치 중 15개는 서로 포개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제도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일이지만, 사회가 정말로 망가지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다.”
우리가 정말로 망가지는 상황이란 걸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위협을 두려워하며 정치적 극단주의와 가부장적 전체주의가 약속하는 허황된 안보 담론으로 끌려 들어가는 미국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데, 세계 어딘들. 섣불리 퇴행을 말하고, 인류가 망했다고 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도 필사적이어야 한다.
온갖 해법을 을 궁리하던 저자는 공자의 ‘성(誠)’ 개념도 가져온다. “자기 자신과 화합을 이루는 개인적 조화를 타인에 대한 의무와 결합한 것”이 誠이라니. “우리의 개인적 감정과 우리가 세계를 향해 보이는 태도 사이의 조화”고 중요한데 책임감까지 강조한다. 미국 교수에게 공자를 배우다니, 해법 찾아 헤맸을 그도 오죽했으면!
남들 하는대로 성공하거나, 남들 따라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행복을 찾지 않도록 하자. ‘조화로운 삶’이란, 정원을 가꾸고 반려동물과 시간을 보내면서 다들 바닐라 먹을 때 좋아하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는 정도면 훌륭하단다. 개인적 만족감을 느끼는 일에 20% 이상 시간을 더 쓰면 마치 수입이 50% 늘어난 것처럼 인생 만족도가 높아진다. 이렇게 개인의 삶을 되찾고 타인에 대한 의무도 천천히, 함께 고민해보는 수 밖에. 현실을 공유하고, 공통의 가치관을 나누며,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도 함께하는 삶, 이게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즈음이다. 머리로는 안될거야 하면서 가슴으로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고민하는 모순적 나날을 보낼 때 읽어볼 책이라고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