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배틀애프터어나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님 <어쩔 수가 없다>를 어찌 풀어야 하나 갸웃할 때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봤다. 영화제가 사랑한 한국과 미국 감독들의 2025년 작품은 묘하게 연결된다. 신랄한 시대 고발 블랙코메디, 좌충우돌 소동극이란게 원래 세상이 엿같아서 나오는거 아니겠나.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술과 마약에 찌든 중년 아재. 하지만 16년 전 그는 혁명가였다. 구금된 이민자들을 해방시키는 폭탄제조범. 동지 퍼피디아와 종말론적 연애에 빠져 딸을 낳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신분을 감춘채 딸에 집착하는 소시민 홀아비다.
백인 우월주의가 국가 기조처럼 보이는 영화 속 미국은 철저한 차별과 분리 정책으로 이민자들을 탄압한다. 무장 투쟁을 이어가는 혁명군은 영장 없이 그냥 쏴죽인다. 무장 군인들이 학교로 쳐들어가는게 가능한 세상이다.
자본에 의해 무력하게 해고된 이병헌 만큼이나 날개 꺾인 혁명군은 세월에 닳아버린 존재다. 그리고 실패한 삶이라는 자조 대신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가족을 지킨다는 사명이다. 가장의 무게는 이병헌을 필사적 구직작전에 나서게 했고, 딸에 대한 사랑은 약쟁이 아빠를 간만에 날뛰도록 했다.
매력적 배우들이 다 내려놓고 우스꽝스럽고 처절한 몸부림에 나선다. 이병헌의 빨간 비닐바지 만큼이나 레오의 파자마는 미친 세상에 어울린다.
다만 박찬욱이 자본에 대해 반기를 드는 대신, 약자들끼리 목숨 걸고 싸우도록 했다면, 앤더슨은 약자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정부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레오는 딸의 가라테 사부(베네치오 델 토로) 도움을 받는데 약자들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경이롭다.
이병헌은 진정 가족만 생각하는 반면, 딸바라기 레오를 구하는 것은 핏줄이 아니라도 상관 없이 사람을 지키는 이들이다. 혼자 살아남은 이병헌의 마지막 장면은 스산하지만, 앤더슨은 함께 버티고 싸우는 이들에게 주목한다. 레오의 젊은날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는 그 싸움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상관 없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는 지켜보는 이들도 설레게 한다.
거장들의 영화라 그런지,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의 미친 연기 만큼이나 소모되는 방식에 놀랐는데, 이쪽은 숀 펜이다. 변태 백인 우월주의자 군인으로서 갈데까지 간다. 사람을 쓸모로만 판단하고, '멤버십' 울타리 안쪽만 챙기는 세상은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굳이 겪어봐야 안다.
한국의 현재와 미래가 어떤 풍경인지, 미국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그게 어떤 세상인지 싸늘하게 보여주는 감독님들. 어떤 가장이, 1세대 혁명가들이 서로 배신하고 죽고 허망하게 삶을 부지하더라도, 그게 끝은 아니다. 우리가 다른 다음을 꿈꾸는 것은 세상이 여전히 구리고, 더 나빠지는 탓이라는 걸 이렇게 배운다.
아참. 모녀로 나오지만 젊은 혁명가 퍼피디아 역의 1990년생 테야나 테일러와 16살 소녀를 연기한 2000년생 체이스 인피니티, 개멋짐.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 뺨 때리는 흑인 미녀와 혼혈 미녀, 감독님 알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