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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의 기쁨과 슬픔

[양평 사람 최승선 033] 경의중앙선과 멸시가장자리악 사이

by 최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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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에 대해 설명하려면, 몇 마디 말보다 몇 개의 짤이 낫다. 그의 연착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해 왔다. 경의중앙선 외에 대안이 없는 사람으로서 나를 호쾌하게 해주는 사람들의 재치에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경의중앙선을 미워하지 않는다. 미워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경의중앙선에게 보내는 위로의 이야기다.


2010년, 중학생이 보기에도 양평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경의선과 연결되기 전, 당시 '중앙선'이 용문역까지 연결된 덕이었다. 그전까지 양평 사람들은 서울에 가기 위해 하루 몇 대 없는 무궁화호를 타거나, 그보다 더 없는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여행에나 어울리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일상의 교통수단, 그야말로 '대중교통'으로 서울을 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양평역이 생김과 맞물려 이디야가 들어왔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양평 시내에 생긴 것이다. 그즈음 던킨 도너츠와 배스킨라빈스가 같이 생겼다. 서울 사람들도 알고, 양평 사람들도 아는 '프랜차이즈'가 양평에 생길 때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떠들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야, 시내에 배라 들어온대" 그 뒤의 말도 같았다. "헐 진짜? 근데 그게 장사가 되나?" 언제 망할지 모르니 부지런히 이용하자고 했다. 프랜차이즈라서 잘 된다는 것도 모른 채.


중앙선 개통은 중학생이던 나와 친구들의 일상도 바꾸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어디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이 '광화문 교보문고'라는 소식을 들었던 나는 친구들을 꼬셨다. "주말에 광화문 갈래? 거기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점이 있대" 컴퓨터로 전철 시간표를 찾고, 환승 정보를 확인하고, 토요일 아침 친구들과 양평역에 모였다.


다녀오는 길엔 여전히 두 손이 가벼웠다. 책은커녕, 밥 먹을 돈도 없어 이삭토스트나 겨우 먹고 온 나들이였다. 그러나 마음은 충만했다. 어른 없이, 우리끼리 서울을 훌쩍 다녀오다니. 양평 시내에 나갈 때도 들뜨던 나이였는데, 광화문이라니! 그 충만함으로 2주 연속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그때 무슨 책을 봤는지, 뭐가 사고 싶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들뜨던 중학생의 표정만은 기억에 남는다.


이후, 정말로 서울 가는 중앙선이 '일상'의 '대중교통'이 되었을 때 중앙선은 경의중앙선이 되었다. '경의'가 왜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용산행이 어딘지도 모를 문산행이 됐다는 것도 영 탐탁지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꼬박꼬박 경의중앙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중앙선이 경의중앙선이 될 때쯤, 나도 드디어 경의중앙선이 고까워지기 시작했다.


경의중앙선은 항상 늦는다. 환승을 할 때 시간을 계산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10분은 연착된다 생각하고 계산해야 한다. 분명 ktx와 무궁화호 시간표를 보내고 대기하는 시간까지 시간표에 반영되어 있는데도! 꿋꿋하게 늦는다. 정말 놀라운 점은 용문에서 출발하고 고작 1역 지난 원덕역에서도 늦는다는 점이다. 1역만에 늦는다면, 출발부터 늦는 걸까? 용문역 탑승객 독자가 계신다면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경의중앙선이 나쁘지 않다. 10시 전철을 타러 갔지만 역에 10시에나 도착해 버렸을 때, 경의중앙선이라면 포기하긴 이르다. 역 입구에서 플랫폼까지 3분이 걸리더라도, 일단 뛰면 혹시 모른다. '당역 도착'을 보며 교통카드를 찍더라도, 계단을 뛰어 오르내리면 혹시 모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경의중앙선이 가르쳐준 교훈이다.


늦는 것보다 문제인 점은 온도다. 경의중앙선은 항상 춥다. 추위를 잘 타는 사람으로서는 이 같은 고역이 없다. 겨울엔 지상역이니까, 문이 열려있는 내내 춥다. 남한강을 따라 운행되는 노선인만큼 강바람 때문인지 정말 춥다. 문은 또 왜 그렇게 오래 열어두는지. 다른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승객들 추울까 열차당 문 하나만 열어둔다 해도 춥다. 정말 괴롭다.


그렇다고 지'하'철이 되는 건 더 싫다.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바람에 발목이 깨질 것 같아도, 상쾌한 공기가 있어서 좋다. 남한강이 보이는 풍경과 숲이 보이는 풍경, 마을이 보이는 풍경이 있어서 좋다. 운길산-팔당 노선의 영원할 것 같은 터널만 지나면 펼쳐지는 절경이고 장관인 풍경으로 경의중앙선을 용서한다.


하지만 경의중앙선은 여름에도 춥다. 승객이 많지 않아서인지, 노선이 길어서인지 경의중앙선의 추위는 다른 노선과 차원이 다르다. 용문에서 출발하여 원덕역을 거쳐, 양평역에 왔는데 벌써 얼음장 같은 열차가 나를 기다린다. 그중 많은 노선은 스테인리스 좌석이다. 정말 고역이다. 한여름에 기모후드집업을 챙기게 만든다. 짐이 많아 가벼운 셔츠 하나 챙긴 날엔 벌벌 떨다가, 체면을 무릅쓰고 가방에서 파자마를 꺼내 걸쳐 입었던 기억도 있다.


이걸 좋다고 할 이유는 없다. 여름에도 얼음장 같은 노선, 움직이는 냉동고. 2-3역 가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기본 20개 역, 1시간 10분~40분씩 타는 사람에겐 말 그대로 '고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노선이 길어서 생기는 이유라면, 그것도 용서하겠다. 경의중앙선만큼 독서가 잘 되는 노선이 없다.


양평에선 출근 시간이 아니라면, 주말 2~4시 사이가 아니라면 대체로 앉아갈 수 있다. 돌아올 때도, 퇴근시간만 아니라면 금방 자리가 나고 보통 40분~1시간 이상은 앉아 온다. 영화 한 편을 보고도 시간이 남기도 하는 그 긴 시간 동안 전철에 앉아있자면 절로 책을 찾게 된다. 언제 내려야 할까 조마조마할 마음도 없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그곳에선 책이 읽힌다.


나의 독서량은 언제나 경의중앙선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어떤 경의중앙선들은 '독서바람열차'니, '달리는 도서관'이니 하는 콘셉트로 운영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앉아 갈 수 있고, 체류시간이 긴 열차는 그 자체로 달리는 도서관이 된다. 나의 많은 완독 인증 사진은 경의중앙선 특유의 '코레일블루' 바닥을 배경으로 하는 이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보다 경의중앙선에 어울리는 문장이 없다. 비록 더블 덕소행으로 나를 분노하게 하지만(경의중앙선은 보통 덕소행과 지평행이 번갈아 가며 오고, 덕소는 양평까지 40분가량 걸린다.), 운길산-팔당 터널은 가도 가도 끝이 안 나지만, 배차간격 최악일 땐 50분도 기다려봤지만, 서울 가는 날 경의중앙선에서만 3시간을 넘게 있지만! 어쩔쏘냐. 있어줘서 고맙다 생각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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