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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엔 수국을 꺾었다

[양평 사람 최승선 049] 5월은 수국의 계절

by 최승선 Feb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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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는 좀 특이하게 다정하다. 딸아들 학예회에 한 번을 안 오면서, 스승의 날엔 수국을 꺾었다. 그 수국은 10분을 걷고, 10분을 버스 타고, 30분 뒤에야 선생님을 만나는 어린이에 손에 들려서. 포장도 되지 않은, 정말 등굣길에 공업 가위를 들고 와 똑- 똑- 자른 꽃 한 송이를 딸 손에 하나, 아들 손에 하나씩 쥐어 주곤 선생님 가져다 주라는 명령어를 입력했다.


선생님들을 좋아했지만, 숫기는 없었던 어린이는 그 꽃을 너무너무 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선생님 꽃 안 챙겨주는데! 대단하지도 않은 선물을 어떤 타이밍에, 어떤 말과 함께, 어떤 표정과 태도로 줘야 할지 안 가르쳐줬으면서! 선생님에게 꽃을 주는 정식 순서가 없는데, 먼저 선생님에게 선물을 건네는 순간이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꽃을 버리고 싶었다. (그 어린이는 훗날 지각하는 게 부끄러워서 결석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빠의 명령어를 거부할 근거가 없었으므로, 아빠가 준 꽃을 내다 버리는 건 대쪽 같은 T 어린이에게도 불경한 일 같았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선생님의 것 같은 꽃을 내 맘대로 처분하면 안 될 것 같았으므로 쭈뼛쭈뼛 선생님에게 꽃을 드렸다. 

선생님, 이거 아빠가 주래요


'선생님, 저희 아빠가 스승의 날이라고 선생님 드리래요.' 정도의 문장력을 구사하기엔 언어 능력과 사회성이 발달하지 못한 어린이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와!! 이거 선생님 꺼야? 아버님이 너무 낭만적이시다! 수국도 너무 예쁘네~! 고마워, 승선아!"라며 목소리에 느낌표를 한가득 실어 화답해 주셨다. 의아한 일이었다. 오다 주웠다- 격의 선물에 지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선생님이니까, 으레 하는 빈말 같은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성인이 되니 집 앞 수국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수국이 풍성해지면, '스승의 날이 다가왔구나'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아름다움을 누구에게 줄까 고민하다가 아이들의 선생님을 떠올린 아빠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 갑자기 나타난 어린이의 꽃 선물에 밝아졌을 선생님의 아침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들과 북클럽을 하면서 이런저런 선물을 많이 받았다. 벼룩시장인지, 플리마켓인지에서 800원 주고 샀다는 공룡이 시작이었다. 낄낄거리며 '선생님, 선물 가져왔어요!' 하던 아이들의 태도에 큰 기대가 없었는데 부직포 공룡 인형이 너무 귀엽고, 선물을 준 사람과 너무 잘 어울렸다. 무척, 무척 마음에 들어 "와!! 공룡이네! 나 공룡 너무 좋아해!! 너무 귀엽다!! 이거 거실에 잘 보관할게!!'라며 목소리에 느낌표를 한가득 실어 화답했다. 아이들은 '이렇게까지...?' 싶은 태도였지만.


그 이후로 어쩌다 오니기리를 닮았다는 누명을 쓰게 되어 오니기리 키링과 파우치를 받기도 하고, 공룡 인형과 공룡 마스킹테이프를 받기도 하고, 크라운산도를 세 박스씩 받기도 하고, 맛있다 하던 초콜릿을 받기도 하고, '애들이 안 가져오면 때릴 것 같았어요'라는 말과 함께 나름의 컬렉션을 받기도 했고, 귀여운 플라스틱 반지와 헤어핀과 플라스틱 인형 키링을 받기도 했다.


수국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어서 상상할 수 있었던 아빠와 선생님의 마음과는 다른 이해가 트였다. 여느 때와 같이 나의 할 일을 하러 갔는데, 여느 때와 달리 주어진 이벤트의 즐거움의 맛! 어린이들이 기획과 마음을 담아 주는 선물(간혹 그것이 정말 오다 주운 것이라 하여도)을 받는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누가 시켜서 억지로 배달만 한 것이라 하여도, 전달자로서 수행하는 마음은 주는 사람에 비해 받는 쪽에서 함부로 곡해하여 더 크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5월에도 수국은 핀다. 다음 5월에도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을 함부로 수국에 투영할 계획이다. 남들보다 더 풍성한 수국의 아름다움을 만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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