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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May 29. 2022

외발자전거

vol.1 중국 하이난 - 2 -


- 2 -


동양의 하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중국의  하이난은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 정도?’라고 대수롭지 않은  말하기에 면적이 제주도보다 19배나 크다. 날씨는 1 내내 연평균 20 안팎으로 늦여름과 초가을 날씨정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 마침 중국 기상일보에 ‘한파소식이 있었다는데, 당시 기온이 15 정도였다. 매년 영하로 떨어지는 매서운 한파에 훈련된 우리로써 귀여운 일기 예보였다.


270미터 높이의 야생 수풀림으로 우거진 중국의 남산에는 43.7평방킬로미터의 엄청난 규모의 자연풍경구가 있다. 불교문화는 물론 열대의 해양과 민속풍경, 역사고적이 한 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해외 관광객만큼 자국 관광객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불교문화를 잘 유지해오고 있는 여러 동양의 국가들을 여행하다보면 종교가 주는 엄청난 에너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런 나라들은 불교를 특정 종교라고 국한시키는 것이 어색할 만큼 불교적 정서가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남산자연풍경구로 들어갈 때도 느낄 수 있었는데,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않는 대신 진심으로 시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로 적당한 인원을 모아 정중히 합장 후에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입장료를 냈다고 해서 순서 없이 입장할 수 없는 이러한 방식에서 나는 우리가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내세우는 서두름과 경쟁, 그리고 자만을 다스리는 하나의 정서라고 해석했다. 함께 온 아홉 가족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몸이 불편해 걸음속도가 더딘 가족들을 앞에 세우며 기다림을 즐기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리가 불편한 엄마는 자연스레 자녀의 뒤로 섰고, 자녀들은 뒤에 선 엄마 옆으로 나란히 순서를 맞추었다.



드넓은 풍경구 중앙을 가로질러 끝까지 가면 삼면에 부처가 있는 삼면관음상을 만날 수 있다. 높이가 108미터나 되어서 입장과 동시에 보이긴 했지만 가까이서 마주한 삼면관음상은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했다. 지혜, 자비, 평화를 의미하는 삼면관음상의 엄청난 크기에도 뜻이 있었는데, 불교에서 뜻하는 108번뇌의 상징적인 숫자였다. 삼면관음상 앞으로 문전성시를 이룬 관광객들에서 아홉 가족 중 몇 몇도 향에 불을 붙여 방석 위에 엎드렸다. 카톨릭 신자인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두사부일체로 여기고 향을 피워 소원했다. 나를 따라 기쁨이도 옆에서 절을 올렸는데,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대신 천재적으로 기억력이 좋은 기쁨이가 엄마와 함께 한 오늘을 잊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고 보니 입장할 때부터 내 곁에 기쁨이가 있었다. ‘가족애재발견’이라는 여행의 의미를 채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는 ‘엄마랑 같이 다니는 게 좋지 않아?’라고 몇 번이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아요’ 였다. 엄마도 오늘만큼은 평소처럼 기쁨이에게 신경을 쓰기보다 모처럼 만의 여유를 누리고 싶으신 건가 오해도 했었다. 그 생각이 오해였다는 건 한 두 번 고개를 돌려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부끄러움과 함께..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오른쪽 저 뒤에 계셨고, 오른쪽으로 돌아봐서 보이지 않으면 왼쪽 저 뒤에 엄마는 느린 걸음으로 기쁨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와 기쁨이네 엄마가 눈을 맞추었을 때, 엄마는 다가와 말씀하셨다.


“기쁨아, 선생님 귀찮으시겠다.

얘가 나랑 같이 다니는 걸 싫어해요. 내가 잔소리하니까 듣기 싫어서 (웃음)”


갑자기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아무리 귀한 자식이어도 매번 손이 가는 자식이 때로 귀찮을 수도 있겠지했던  부끄러운 오해를 불식시킬 핑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찾아낸 구차한 변명은 ‘나는 아직 자식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몰랐으니까 고작이었다. 그렇다. 어떤 엄마한테는 깨물지 않아도 이미 아픈 손가락이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른 내아이는 그저 존재만으로 기특하고, 그래서 뒷모습만 봐도 기쁘다는 마음의 깊이를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숱해 전인가 엄마와 언니 그리고  이렇게 셋이서 살던 , 언니의 결혼과 함께 우리는  식구가 되었다. 30대로 들어서면서 나는 겉멋이 들었었고, 결국 대책 없는 독립을 선언했었다. 식구가  뿐인 조촐한 살림살이의 절반 정도를 이삿짐로 묶다가 잠시 쉬던 엄마에게 소심하게 말을 건넸다. ‘귀찮게 해서 미안해.’   돌아온 엄마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 모든 엄마는 내 자식이 어떻든 귀찮을 수 없어.

엄마들한테는 유일하게 자유롭지 못한 자유가 너희들이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뒤늦게 기쁨이에게 한 가지 약속을 청했다.


“기쁨아, 앞으로 엄마대신 다른 사람과 다닐 때는 한 번씩 뒤돌아보고 엄마를 찾기로 하자.

엄마처럼 너도 엄마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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