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의 정신분석 상담치료. 나도 몰랐던 나로 돌아가는 길.
이 글은 마지막 투병기(1) 퇴사와 ADHD의 다음 편입니다. 지난 편을 보시지 않은 분이라면 1편을 보고 읽으시길 추천해요:)
요즘 고등래퍼4를 재밌게 보고 있다. 본방 시간인 금요일 11시는 우리 집 가장 중대한 스케줄이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오랜 팬이라 안 본 게 없는데 그중에서도 이번 고랩 4는 역대급이다. 어느 시즌보다 참가자들의 실력과 귀여움이 심각하게 한도 초과다. 박재범, 쌈디, 염따 같은 멘토 래퍼들의 아빠 미소가 방송을 보는 내 얼굴에도 번진다.
지난주 방송은 세미 파이널로 5명의 무대를 보여주는 편이었다. 너무 좋았던 무대가 많았지만 특히 가슴에 오래 남는 음악이 있었다.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이상재 군이 공연한 노래, <Red light>
이 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듀서 중 하나인 코드 쿤스트가 작업하고 하이어의 빅 나티가 피처링까지 한 곡이라 당연히 좋을 줄은 알았지만. 무엇보다 상재 군이 직접 쓴 가사가 너무 깊고 대단했다.
주위 사람 떠났네. 하루가 다르게 불안해져.
바닥으로 추락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겠어.
난 숨지도 못해. 모든 부담이 목을 마구 조여 대.
날 욕해 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머릿속에.
후렴구에 반복되는 이 가사가 이 글을 시작하게 했다.
지난 1편에서 얘기한 ADHD가 유일한 내 문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함께 받은 심리검사를 통해서 다른 문제가 있다는 원장님의 소견과 진단서를 받았다.
개인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다연 씨는 남편분과 결혼을 통해 정서적인 안정을 크게 찾았고 행복감을 느끼고 있어요. 덕분에 현재는 괜찮지만 과거에 겪은 부정적인 사건에 대한 잔상이 잔존해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반추가 종종 있어 부정적인 영향은 여전해 보입니다. 심리적인 어려움을 직면하고 수용하기보다 다소 회피하고 무마하는 방식으로 대응이 가장 쉬웠을 거예요. 하지만 현재의 정서적 안정 상태를 꾸준히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갈등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검사 전에 해오라며 숙제로 내주신 문장 완성 검사와 여러 검사지에서 느꼈다. 왜 이 질문만 봐도 마음이 어려울까 신기했다. 심지어 대면해 진행하는 심리검사에서는 임상심리사님이 질문을 하실 때마다 덮어놓고 지냈던 마음의 구멍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전달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왜 나는 이렇게 눈물이 날까. 지금은 행복하고 다 괜찮은데 왜 이 생각만 하면 힘이 들까.
이 기억들이 여태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마치 인생을 책으로 비유한다면,
내 어린 시절의 챕터는 눈물로 축축이 젖었다 쭈글쭈글하게 말라버린 페이지들이었다.
하지만 원장님이 내게 몇 번을 말씀해주신 것처럼
지금 행복하기에, 지향점을 경험했기에, 문제를 대면할 마음의 에너지가 있는 '지금' 병원을 찾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더 나아지고 싶어서 온 게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강렬한 동기가 없이는 모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남편에게 정신과에 가고 싶음을 알렸고
다행히 추천받은 병원을 예약했으며
다행히 예약을 취소하지 않았고
다행히 누구에게도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던 심리적인 치부를 접수서에 적었고
다행히 그렇게 벌거벗은 나를 긴 진단검사에 내놓았다
모든 게 다행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간절함이 모든 부끄러움과 걱정을 덮었기에.
그래.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
상담을 받기 전까지 몇 개 되지 않는 여정에서 포기할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많다. 실제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퍼널의 중간마다 이탈을 해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주변에 알리지 못해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좋은 병원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예약 전화를 하는 용기가 나지 않고, 예약을 하더라도 취소를 하고, 병원에 가더라도 진짜 문제를 얘기하지 못하며, 진단 검사를 제안받더라도 또 한 번의 고비 앞에서 포기해버리는 것.
이 글을 적는 큰 이유 중에 하나다. 내 경험을 토대로 정말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알려서 많은 사람들의 ‘다행’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 후 매주 금요일 한 번씩 원장님과 40분 동안 상담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상담은 거르지 않았다. 혹시 의지가 약해질까 봐 간호사분들을 설득해 매주 같은 시간에 예약을 미리 잡아두었다. 심지어 여행을 가서도 상담이 있는 날엔 새벽같이 올라와 병원을 갔다. 나도, 남편도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역시나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 달 동안은 상담 내내 눈물 콧물을 뺐다. 얼마나 울었던지 상담실을 나올 때마다 주머니 속은 주먹으로 꼭 쥐고 있던 눈물 젖은 티슈로 가득 찼다. 마치 상담실의 내 모습처럼 구겨지고 축축한 잔해들이었다.
정말 맘껏 울었다. 아이처럼 엉엉 울지는 못해도 이렇게 울면 내 몸에 수분이 남아있으려나 싶을 만큼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질질 눈물이 났다. 1분 안에도 수없이 많은 복합적인 감정이 엇갈렸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하나하나 곱씹어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어린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가슴이 시렸다.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장면과 당시 생각과 느낌들이 툭툭 나왔다. 늘 메타인지가 높다고 생각했던 터라 너무 생경한 기억과 감정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초반에는 혼자 감정을 해소하기에 벅차 상담을 다녀올 때마다 남편을 붙잡고 운 날이 많았다.
그래서 가기 싫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 잘 살고 있는데,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괜히 수면 위로 올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해결하고 싶다고 해놓고선,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이 소화가 힘들 때면 언제 열었냐는 듯 다시 덮어두고 싶었다.
상담실 밖의 현실도 처음에는 참 불편하다. 아직 정리가 안된 감정을 안고 벌겋고 퉁퉁 부은 눈을 간호사분들에게, 약사님에게 매번 들켜야만 하는 것도 부끄럽고, 검사지 봉투에 적힌 정신과라는 글자를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뒷면을 보이려 손으로 꼭 잡고 있을 때도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묵혀둔 쓰레기들이 내 키보다 큰 주머니에 담겨 집을 차지하고 있는데, 매주 주머니 하나씩을 갖다 버리는 느낌이랄까.
심지어 있는지도 몰랐던 주머니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주머니엔 내가 '내 탓, 내 실수'라고 적어놨는데 상담을 하다 보니 '아픔의 표현'이나 '보호하려는 본능'이라고 바꿔 적을 수도 있었다.
1-4회기까지는 혼자 말하는 일이 많았다. 회기 차례대로 원장님이 유년기, 10대, 20대, 30대의 현재를 나눠 본인에게 어떤 삶이었는지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혼자 이야기만 하는데 이게 치료가 될까. 30대 이야기하고 나면 이제 뭘 하시려는 걸까 하고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진짜다. 요즘 느끼는 감정과 불편을 다시 그 시절에 근거해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잘못된 안경을 끼고 보았던 세상에서 내가 뭘 오해했었는지를 찾는다. 특히 원장님에 의해 내 삶이 객관적으로 해설되는 기분도 좋았다. 정신과 상담은 위로와 공감보다는 정신분석에 집중하기 때문에 삶의 주인공이라 내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짚어내고 해설해주시기 때문인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는 매주 상담시간이 기다려졌다. 한 주간 새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떠오를 때면 '이거 금요일에 원장님한테 말해야지'라고 되뇌며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상담실에 가 풀어놓으면 역시나 해답을 찾는다.
세상에 이 좋은 걸, 왜 망설였을까.
그렇게 힘들지만 조금씩 나아갔다. 세 달 정도 됐을까. 상담을 거듭할수록 많은 감정과 불안이 해결된걸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 싶을 만큼 나에 대한 믿음과 인정이 싹텄다. 불쑥 튀어나와 괴롭히던 나를 향한 불신들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슈를 해결한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그에 영향을 받고 있던 현재 시점의 문제가 보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였다.
원인 :
어린 시절 주 양육자로부터 정립된 부정적인 자아상과 안정적이지 않았던 애착관계
결과 :
- 남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나를 변신시켜 사는 것.
- 그런 탓에 남의 평가에 연연하며 힘들어하는 것.
- 따라서, 부족하고 못난 나를 알고 실망할까 봐 누구든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나와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나를 외향 중에서도 극 외향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워낙 커뮤니케이션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아니고, 일에서는 더욱 주도적이고 직설적인 편이다. 늘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일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 내 장점이라 주변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얘기하건대 많은 부분이 애를 쓰는 연기였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저 나도 모르게 나오는 내 본능 때문에 상대의 기대에 맞추려고 모든 에너지를 그에 쏟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즉, 누구보다 커뮤니케이션에 부담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주어지는 역할에 맞게 충실한 연극을 펼칠 뿐이었다.
특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인 친교를 쌓고 그를 통해 결과를 내야 하는 직무의 일을 왜 내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지도 설명이 됐다. 남들은 전혀 문제가 없는 일이 내게는 너무 큰 에너지를 써야 했던 이유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퇴근 시간만 되면 꽁무니 빠지게 집에 가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에너지를 다 써버렸기에 얼른 나 자신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시간이 절실해서.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노는 게 좋지만 나는 늘 집에 가스불을 켜고 온 것처럼 부리나케 집으로 가는 친구 중 하나였다. 오래된 사이일수록 점점 편해지기에 정도는 나아지지만 나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관계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조차 나의 애정과 관심이 그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채감은 늘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연기하지 않는 관계도 있었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거라 신뢰하는 사람. 지금은 남편이 된 그 사람이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도 서른살 정도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가져본 안전지대였다. 힘겹게 찾은만큼 이거 하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집에 왔을 때 길었던 하루의 연극을 마칠 수가 있어야 하기에.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됐다. 이건 내겐 생존의 문제였고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거라는 걸.
부모의 사랑이 간절했던 어린 나로서는,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나 그대로를 미워해야 했다. 자연스레 못난 진짜 모습 대신 지어낸 모습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연극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자랐다. 상대의 기대에 맞추는 일은 내 인생의 목적이자 성취였고 KPI였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남들이 없는 걸 하나 가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빠르게 읽어내는 더듬이. 즉, 남들보다 타인의 감정과 뉘앙스를 읽는 능력이 어쩔 수 없이 많이 발달한 것. 심지어 원치 않을 때에도 사람들의 말과 글, 표정에서 입력되는 메시지들은 허락도 없이 들어와 내 안에 범람한다. 그에 대한 리액션은 당연히 자동이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메시지를 해야 상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너무 잘 아는 이유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주업인 마케팅/PR일에서는 큰 도움이 됐고, 특히 조직문화와 HR분야에 들어온 이후에는 미묘한 사람과 조직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더욱 핵심역량처럼 쓰였다.
내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더듬이는 결국 내가 사랑받기 위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생존 도구였던 것이다.
이걸 알게 된 상담 중에 눈물이 솟구쳤다.
왜 내가 이렇게 돼야만 했는지는 모른 채
나는 즐거이 배우로 살았던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무서운 일은 애정을 갖고 있는 상대가 내게 실망을 하는 일이다.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본능은 막을 수 없고 하지만 나도 심리적인 한계가 있으니 그런 상대가 최대한 적어야 내가 살았다. 그러니 미리 거리를 두는 전문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외향적인 내 분위기만 보고 쉽게 친해질 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장벽이 높다는 것에 놀랬다는 걸 많이 들었다. 나를 친한 친구나 친한 동료로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도 본인과 같은 온도로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것에 서운해한 사람도 있었다.
정말 미안했지만 나도 내 가난한 마음의 이유를 몰랐다. 그냥 나는 많은 사람을 챙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음을 안다. 그냥 내가 살기 위해서였다. 거리를 두어야만 실망시킬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내 마음의 문을 최소한 여는 걸로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자연스레 높아지는 기대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렇게 되는 것도 나 때문이다. 평생 남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는 것을 해왔으니 도가 텄고 그 연극을 바탕으로 상대는 더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느 지점을 넘어설 거 같은 때가 오면 나는 두려워졌다.
내가 생각하는 실제의 나는 한없이 초라하고 부족해서, 상대의 기대와의 갭이 크게 벌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낱낱이 쓸모없는 나를 알게 될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분기점이 가까워진다고 생각이 들면 그떄는 불쑥 아이가 된 것처럼 본능이 나왔다.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
내 진짜 모습을 들키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내 모든 걸 소진하며 대본에 맞게 배역 그대로를 옮겨왔다. 그러다 에너지가 다 닳았을 때가 되면 나의 진짜가 들켜버릴까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아직 내게 기대가 없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인생을 살아오면 이성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의사결정들이 모두 이 탓이었다.
물론 내가 그걸 만족스럽게 생각했다면 그것도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화해도 내가 부족하고 못난 인간이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는 자책감을 씻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악순환이었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가난한 마음은 일생을 걸쳐 내가 사랑하는 나의 일, 친구, 가족과의 관계를 해치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도 못하게 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다.
11번째 상담을 마쳤던 3월 초.
우연히 내겐 시험이 될만한 두 개의 사건이 벌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상처를 받고 도망가고 싶어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 진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장이 떠올랐다.
유체이탈을 해도 이것보다는 안 놀랬을거다.
상담을 시작한 지 다섯 달이 다 되어간다. 날이 갈수록 편해지는 삶을 느끼고 있다.
지난 상담에서는 이제 한 달에 한 번씩만 와도 될 것 같다는 진단까지 들었다. 상담에서는 이런 게 졸업을 향해 가는 거라고.
33살에 마치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다. 긴 치료를 통해 얻은 건 나에 대한 믿음과 애정 정도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큰 거라고 나를 한없이 추락하게 했던 마음의 불안과 자기혐오가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상담을 가도 '이게 슬프고 힘들어요'라는 말은 없고 '늘 지금 같았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이런 게 아쉬웠는데 그래서 이렇게 시도해보려고요.'라는 말이 많아졌다.
새로운 버전의 나로 사는 건 매일이 도전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어 배우로 살았던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씩 도전해보는 재미에 살고 있다.
20명이 넘는 친구들에게 주기적으로 먼저 안부를 묻고 만나는 약속을 제안하는 사람이 됐다. 매달 만나고 싶다며 정기 일정을 잡은 친구들도 12명 남짓이나 된다. '절대 먼저 연락 안 하는 친구'의 대명사였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 늘 사랑을 먼저 표현하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즐거운 사람이 됐다. 세상에. 친구라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업무적인 목적이 없더라도 배우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콜드 콜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여태껏 일을 하며 감사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부채감이 많았는지. 업무 복귀를 하며 체크박스 리스트로 꼭 연락드릴 사람들을 적기까지 했다. 그리고 벌써 많이 지웠다:)
감사하게 제안받은 일을 시작으로 새로운 여정을 만들어 가고 있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를 여실히 느끼고 있다. 하고 싶은 시도나 업무를 진행하는데 방해가 될 마음이 없다는 것. 얼마나 자유로운 기분인지 모른다.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얼른 일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정도. 탄탄한 토양에서 집을 짓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매일 놀라고 있다. 참고로 새로운 일에 대한 이야기는 이 마지막 투병기를 마치고 시작할 예정.
그렇게 내가 평생을 짊어지고 왔던 부족함을 지워냈다고 생각했다.
불완전했던 예전의 나에서 조금이나마 나아진 모습으로 고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상담에서 원장님이 이런 말을 해주셨다.
다연 씨는 오히려 다연 씨가 생각한 본인과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요.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습은 사실 원래 다연 씨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거죠.
결국 고쳐서 지금처럼 바뀐 게 아니라 이제서야 원래 본인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처음 보는 내 모습이지만 이게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라면? 그 말을 듣고 하루종일 미소가 나왔다.
상담을 위한 위로의 말이 었을지라도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원래 괜찮은 사람일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왜 그렇게 힘이 되는지.
만약 상처가 없었다면 내가 참 단단하고 자유로운 어른이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좋았다. 그런 친구들이 늘 부러웠는데 이대로만 가면 진짜 나였어야 할 나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생겼다.
� 아래 무대 영상을 다 보시고, 남은 글을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다시 <Red light>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노래는 부정적인 고통, 죽음을 상징하는 상재 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나 2절부터는 빅 나티(Big Naughty)가 반대로 긍정적인 희망, 생명을 상징하는 'Green light'를 대변한다. 그렇게 한동안 상반된 두 색깔이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잔잔해지는 곳의 마지막 부분이 클라이맥스. 절망이 가득한 Red light 후렴구를 완전히 반대로 덮어버리는 Green Light 가사가 아래처럼 이어지며 무대는 끝난다.
내 투병기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아 소름이 돋았던 이 가사를 옮기며 글을 마친다.
(Red light)
주위 사람 떠났네. 하루가 다르게 불안해져.
바닥으로 추락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겠어.
난 숨지도 못해. 모든 부담이 목을 마구 조여 대.
날 욕해 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머릿속에.
(Green light)
친구 모두 모였네. 하루가 다르게 행복해져.
더 높이 가는 듯해.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겠어.
난 숨지도 못해. 모든 행복들이 날 조여 대.
날 욕해 대는 소리가 들려도. 난 지금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