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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대디 Aug 17. 2023

② 새로운 도전

매일 성장하고 싶은 아빠의 도전

“성공이냐 실패냐, 아빠의 도전!”


혹시 [특명! 아빠의 도전]이라는 TV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지.

1997년에 방영된 가족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으로 당시 꽤나 인기가 있었던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주요 골자는 아빠에게 도전 과제가 주어지고, 해당 도전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아빠는 일주일 간 맹연습을 한다. 그리고 결전의 날 스튜디오에서 아빠의 도전이 시작된다. 성공하면 가족 구성원이 가지고 싶어 하는 갖가지 상품을 가져갈 수 있다. 아빠가 도전에 성공하면 온 가족이 울며불며 행복해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엔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만약에 우리 집도 [특명! 아빠의 도전]에 나간다면 나는 게임기를 가지고 싶다고 해야지. 이런 정도의 마음이었다.


아빠가 된 지금의 나는 그 프로그램이 방영된 시기와 취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고, 그 당시 아빠의 마음, 가족의 마음이 어땠을지 다시 되새겨보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1997년은 IMF로 인해 온 나라가, 온 가족이, 대부분의 가장들이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기죽은 아빠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프로그램이 기획된 것이다. 도전의 날, 도전에 임하는 그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아빠를 보는 아내의 마음은? 성공했을 때 눈물짓던 그들은 마음은 원하는 상품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간신히 지켜낸 가장의 자존감과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족의 긴장감이 안도감으로 바뀌면서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 눈물의 의미를 20년이 훌쩍 지난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도전.

도전이라는 단어는 내게 불편감을 준다.

나는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고, 좀처럼 안전지대를 벗어나기 꺼려한다. 평소 로우 리스크(Low-risk) 로우 리턴(Low-return)의 삶을 지향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전에는 필연적으로 성공과 실패가 따라오게 마련이다. 남들 눈치를 보며, 평가받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도전을 피하고 싶었다. 그런 겁쟁이 같은 내 삶 속에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도전할 일들이 생겼다. 내가 도전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특명! 아빠의 도전]에 나온 아빠들처럼 내 가족 때문이었다.


내 인생을 바꾼 뜬금포 첫 도전

내 삶에 일탈 같은 첫 도전은 전공과 무관한 심리 상담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었다. 작은 사건과 멘토의 추천 한마디로 인해 내 평생 계획에 없던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당시에 나는 아내와 결혼을 전제로 연애 중이었고, 업무 강도가 꽤나 높았던 광고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에 생뚱맞게 대학원 진학이라니.



회사의 배려로 야근할 시간 중 이틀, 토요일에 하루를 할애하여 수업을 들었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쪽잠을 자며 리포트를 작성했고, 아내와 데이트하는 시간에도 전공 책을 읽어야 했다. 일주일에 몇 번 못 보는데, 그 와중에도 과제하느라 정신이 없던 남자 친구. 결혼 자금을 모으긴커녕 학자금 대출로 대학원에 간 남자 친구. 그런 나를 보는 아내는 항상 불평 대신 내 건강을 우려했고, 나의 도전에 뜨거운 응원을 해주었다.

이 무모한 도전의 결과는 어땠을까.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평가는 대성공이다.


그전까지의 나는 인간관계보다 일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 그런 내게 심리 상담 공부는 타인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게 된 사건이 되었고, 불특정 다수를 넘어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결혼 전 나의 원가족에 대한 이해와 정리, 결혼 후 내 가정에 대한 청사진 등을 그려볼 수 있었고, 나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아내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게다가 재학 중 첫째를 임신했기에 태어날 아기에 대한 심리와 발달에 대한 것까지 배웠다. 결혼 준비와 아이에 대한 공부까지 필요한 인생공부를 대학원에서 한 셈이다. 정말 인생에서 황금처럼 귀한 시간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하는 말이지만, 대학원 첫 학기에는 후회의 마음도 들었다. 돈도 안 되는 거, 비싼 돈 내면서 왜 배워야 하나.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원가족이니 뭐니 과거를 들춰내서 마음만 어지럽게 만들고 있나 하는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이것이 인생을 가장 싸게 배우는 것’이라는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의지하여 간신히 마지막 학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그 짧은 2년의 시간으로 내 원가족에 대한 문제,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것들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과 다른 생각의 물꼬가 트였다는 것이 주요했다.


그 덕분에 나는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나의 가정이 있음에 인해 감사하고, 내 아내라서 내 아이들이라서 행복한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나의 첫 인스타툰

첫째 아들 수아가 태어나면서 또 다른 도전을 했다. 그것은 ‘애아빠’라는 이름의 인스타툰을 그린 것이다. 항상 개인 작업에 대한 목마름은 있었지만, 그 주제를 잡지 못해 헤매던 내게 아들의 탄생은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갑자기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직 어린 우리 아들이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는지 모르고 삶을 방황하지는 않을까’하는 최악의 상상을 했다. 너는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인스타툰을 그리기 시작했다. 팔로워가 많지 않아도, 그저 먼 훗날 수아가 즐겁게, 또 의미 있게 봐주길 바라며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도전은 얼마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서 그런지 손이 느렸고, 일과 육아를 하며 꾸준히 결과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 타이밍에 둘째 은아가 생겼다. 마음에 여유는 사라졌고, 차라리 이 시간에 수아랑 더 놀아주고, 집안일이나 더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애아빠는 멈추게 됐다. 두 번째 인스타툰 ‘굿대디’를 시작하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한 번 손을 놓게 되니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는 것은 더 어려웠다. 아빠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굳은 의지는 ‘언젠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로 미루게 됐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2년의 공백은 아직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청바지를 팔아 볼까

그 비어있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창 유행하던 키워드는 ‘퇴사’와 ‘N잡’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 후 몇 개월을 제외하면 모두 N잡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퇴사와 N잡이라는 키워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관련 책들도 여러 권 읽었다. 그중에 유튜버 신사임당의 글이 눈에 띄었다. 

'장사하는 데는 아프리카 초원과 같이 먹이사슬이 있다. 생산자(사자) → 도매자(하이에나) → 소매자(가젤) → 소비자(풀). 대부분의 사람은 이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 단계인 소비자, 즉 ‘풀’과 같은 존재다. 결국 돈은 풀에게서 사자로 넘어가지만, 풀은 스스로 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강자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생산자와 사자라는 단어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사자가 되고 싶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다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20년 넘게 청바지 프로모션 업체를 운영하고 계신다. 의류 브랜드의 데님제품을 디자인부터 생산까지 진행하는 회사였다. ‘아, 이거다!’ 싶었다. 저가형 청바지 브랜드를 만들고 직접 팔아 봐야겠다는 계획이 세웠고, 자연스럽게 나는 장사의 세계 속 사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쿠나 마타타! 그 후로 여러 권의 브랜딩 책을 찾아 읽었다. 촬영도 상세페이지 디자인도 어렵지 않은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이유를 찾아보자면 셀 수 없이 많지만, 청바지에 대한 나의 전문성과 관심이 적었고, 무엇보다 여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패인이었다. 당시에 나는 회사를 다니며, 고정적인 외주 프로젝트를 두어 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청바지 사업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둘째가 돌도 되지 않았기에 육아에 손이 많이 가기도 했다. 바보처럼 사업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는 비루한 핑계와 엄청난 양의 재고만 남았다. 그때는 정말이지 참 많이 우울했다. (하쿠나 마타타는 이럴 때 외쳐야 하건만…)


내게 맞는 옷을 찾다

청바지 사업을 진행하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브랜드 로고도 만들고, 청바지에 들어갈 각종 부자재도 디자인하고, 상품 촬영, 스마트 스토어 등록, 제품 배송 등. 사업계획서를 들고 거래처가 될만한 회사와의 미팅도 했다. 결론적으로 사업은 아직 내게 맞지 않은 옷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대 때부터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했기 때문에 개인 사업자였지만, 외주를 받는 프리랜서와 내 사업을 일으키는 생산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의욕을 잃고 쭈글거리는 내게 아내가 슬쩍 말을 꺼냈다.


“여보, 다시 애아빠 같은 거 해보면 어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가 보였다. ‘아, 너를 위한 것도 있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만화를 그려보기로 했다. 앞서 망한 청바지 사업을 위해 읽었던 브랜딩 책들이 자연스럽게 굿대디에 적용이 되었다.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브랜딩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갔고, 이전 애아빠에선 그저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만 국한되었다면, 이번엔 조금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엔 좋은 인연들도 있었다. 만화를 그리는 아빠 & 아저씨 작가 분들의 도움으로 보다 즐겁고 꾸준히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서서히 팔로워가 늘기 시작했고, 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다. 덕분에 큰돈은 아니지만, 약간의 외주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여러 의미로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굿대디 작가로 작업을 하면서 점점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결과보다 욕심만 더 컸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꾸준한 업로드를 못하게 되면서 게시물의 노출 수와 팔로워 증가도 정체되었다. 괜히 조바심이 났다. 처음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려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다. 제대로 그려내지도 않으면서 성장하지 않는 계정에 조바심을 가지는 나 자신이 참 못나 보였다. 그래서 굿대디를 접고, 새로운 계정을 시작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셋째 소원이가 찾아왔다.



완성형이 아닌 성장형으로

신나는 마음으로 소원이의 임신 소식을 만화로 그려 업로드했다. 예상보다 더 큰 축하를 받았다. 댓글 하나하나에 감사와 감동이 동시에 올라왔다. 아내와 댓글을 읽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별 볼일 없는 계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따뜻한 댓글과 DM을 보니 새로운 계정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내가 참 부끄러워졌다. 우리의 이야기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이전엔 겪어보지 못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참 많이 부족했다. 모두 잠든 늦은 밤 혼자 메모 앱을 켜고 내가 성장하고 싶은 부분을 적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생각을 추리고 정리해 보니 ‘글 쓰기, 일러스트레이션, 영어’ 이렇게 세 가지가 남게 되었다. 만화는 유쾌하지만 너무 쉽게 소비되고, 그 생명력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는 품을 줄이고 마음 편하게 쉽게 그려보자고 마음먹어봤지만, 깐깐한 성격 때문에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차라리 제대로 잘 만들고, 언제 꺼내 봐도 괜찮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졌다. 생각의 끝에 만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콘텐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굿대디라는 계정에 만화 외에 다른 장르의 콘텐츠를 올리는 것은 브랜딩적인 관점에서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굿대디가 100% 완성된 계정은 아니었기에 과감하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글을 쓰고, 삽화를 그리는 콘텐츠. 영어 계정을 새로 만들고, 글을 영어로 번역하며 영어도 공부하는 그런 콘텐츠를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가족 잡지 ‘굿 패밀리’를 구상했다. 얼마가지 못하고 ‘아몰랑 안 해!’라고 멈출 것이 아니라면, 하나를 만들더라도, 성장하고, 발전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되돌아보니...

서른 이후에 있었던 도전들을 순차적으로 적어나가다 보니, 생각보다 도전을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도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라고 여겼는데, 막상 되돌아보니 소소하지만 작은 도전들을 쉬지 않고 계속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도전들도 사실 어떤 모양으로든 내 안의 자산과 자원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의 결과에만 집중하면 도전의 끝은 성공과 실패로 나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기에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도전을 통한 성공도 중요하지만, 도전할 때만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이번 굿 패밀리를 쓰고 그리며, 이번 도전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켜 줄지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아파도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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