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봄을 기다리는 은지들에게
어떻게 위로받고 싶고,위로할지 모르는 은지들에게
봄이 아름답다는 해석은 호된 겨울을 알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지만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은 아무도 모른다.
그때 나는 어떻게 그 사이를 견디고 기다렸을까?
작년 4월 27일 내 생일에는 혼자였다.
남편은 직장, 태어난 아기는 한 달째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었다. 그 날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신이 주신 생일 선물인 "슬픔"을 받았다. 선물의 답례로 무례한 기도를 했다. 감히 침대에 누워서 어린아이가 사탕을 뺏긴 것처럼 울었다.
"왜 지금 내 옆에 아기가 없는 건가요? 왜 없는 거예요? 이유라도 이야기해줘요."
2020년 3월 코로나 19가 한참 심한 대구 대학병원에서 미숙아를 출산했다. 감염을 이유로 출산 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했다. 잔인하지만 당연하게도 퇴원 전까지 면회는 금지였다. 얼굴도 모르는 아기를 잃은 엄마의 마음은 겨울이었다. 밖에는 벚꽃이 만개했지만 나는 혼자 겨울이었다.
무엇을 잃은지도 모르는 상실감 앞에 어떤 위로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를 견딜 수 있었던 연결된 끈은 사람이었다.
같이 있어주는 사람들
산후조리하고 있는 언니 앞에서 낄낄거리며 짜파게티를 후루룩 먹는 여동생, 2주 동안 혼자 산후조리를 도맡은 남편(덕분에 산후우울증을 먼저 당했지요). 저녁 뉴스를 보며 꾸벅꾸벅 졸다가도 딸 산후마사지를 매일 같이 해준 친정 엄마, 매주 따뜻한 국과 반찬을 만들어주신 시엄마.
내 옆에 같이 있어준 사람들이다.
나는 어떻게 그 사이를 견디고 기다렸을까?
당신은 지금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당신은 그 사람에게 어떤 위로를 해주고 싶을까?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삶에 들어와 같이 견뎌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있어 달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같이 있어줘도 되냐고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 겨울의 끝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 봄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