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틴에 집착하는 외계인

미국에 간 겁쟁이 외계인 시리즈

by 글동

나는 어렸을 때부터 루틴 세우기를 좋아했다. 다이어리에 적힌 오늘의 할 일을 하나씩 지우는 것에서 큰 희열을 느끼는 그런 부류였다. 나는 평일, 주말, 백수, 학생, 직장인 등 상황에 맞춰 루틴을 다양하게 세워두고 실천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오기 전 내 하루는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 일정한 하루, 하루 속에서 나는 아주 큰 안정감을 느꼈다.


난 미국에서도 내 시간을 계획하고 통제하며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의 루틴이 있는 한 어디에 살아도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 온 지 2주 만에 침대에 누워 귓바퀴로 들어가려는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미국에서 내가 다뤄야 하는 시간이 한국에서의 시간에 비해 정말, 너무, 막연하게 많다는 걸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나는 직장도, 친구도 없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가거나 서점을 돌아다니는 등의 취미들도 이곳에서는 쉽지 않다. 즉, 정말 하루 24시간을 나 혼자 채워나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기회가 흔치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면 날 위해 비워놓을 수 있는 시간이 애초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생활을 좀 하다 보면 하루는 물론이고 한 달도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 내가 세운 루틴만으로는 하루가 다 채워지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자꾸만 텅 비어버리는 시간들 때문에 나는 발을 동동거렸다. 어쩔 줄 몰라서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가 그런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매일 나의 생산성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왜 이리 생산성에 집착하냐 싶겠지만, 오랫동안 나는 더 높은 성적과 성취를 위해 시간을 투자해 왔기 때문에 생산성은 이미 내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이슈가 된 지 오래였다.


한국에서 나는 항상 시간에게 쫓겨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하고자 하는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간이 날 쫓지 않게 됐다. ‘네가 알아서 가봐. 네가 빠르게 가든, 느리게 가든 너에게 다 맞출게’라고 말하는 시간 앞에서 나는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는 상태가 돼버렸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원망하며 어쩌지? 평생 지금 이 시간을 후회하면 어쩌지? 내가 잘못 가고 있는 거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이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질 수는 없었다. 나는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루틴을 좀 더 많이, 상세하게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 벅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맞은 나에게 욕 한 바가지를 해주면서도 나는 요일별로 비슷한 듯 다른 루틴을 세워가며 균형을 맞췄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지켜야 할 루틴이 있지만 반드시, 꼭 지켜야 되는 건 아니야.' 이 주문은 루틴의 완벽성에 집착하는 나를 위한 일종의 예방주사였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얘 진짜 피곤하다’라고 느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맞다. 나는 아주 피곤하게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나는 나와 함께 살아야 하니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려면 이렇게 매일 노력할 수밖에.


미국에 온 지 6개월째, 나는 서서히 더 많은 일들로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다. 심지어 아주 가끔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하루도 있다. 모두 내 친구인 루틴 덕분이다. 루틴이 없었다면 나는 이 낯선 땅 미국에서 혼자 시간과 맞서 외로운 싸움을 해나가야 했을 것이다. 이 글을 빌어 내 친구 루틴에게 아주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p.s 본인만의 특별한 루틴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