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실패 같았다. 그래도.. 한 번 더 해볼까?
사람들은 추억을 이야기할 때 “옛날에는 공부 잘했는데…”, “우리 집도 예전엔 잘 살았는데…”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내세울 게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별로 계획적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데로 갈 뿐.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신 나에겐 두 가지 고백이 있다.
첫 번째 고백은, 어릴 적 나는 조금 연예인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 엄마가 “계란 좀 사와라” 하시면, 그냥 슬리퍼를 끌고 나가지 않았다.
굳이 머리를 감고, 외출복을 챙겨 입고,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듯 거리를 걸었다.
어린이 동요대회 본선에 올라 TV 출연을 다섯 번 했고,
성악레슨이 발전하여 <하늘나라 동화> 이강산 작곡가님과 함께 음악회도 했고,
전교 어린이부회장을 맡아 매주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를 지휘했고,
방송반 아나운서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운이 좋게도 내가 부른 노래를 전교생이 따라 부르는 코너까지 있었다.
졸업할 때에는 학교 대표로 송사까지 낭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기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 무대 위에서 빛나는 아이였다.
스스로 인정한 어린이 공인이었다.(그땐 그랬지..)
두 번째 고백은, 그렇게 좋았던 기억들이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혹시 알츠하이머라도 걸린 건 아닐까?” 농담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조금 서글프다.
그토록 열심히 살았는데 왜 중요한 순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을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머릿속에 혼선이 많이 된 걸까. 지금은 몇 시간 전 일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일기장에 붙여둔 프린트물 한 장 덕분에 기억해 낸 일도 있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내가 그린 지도가 전교 유인물로 배포된 적이 있는데,
그게 지금의 인포그래픽, 편집디자인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참 묘하다.
“왜 그땐 몰랐을까?”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그 순간 작은 부분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때부터 디자인을 했었겠지,
그때 노래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면 진로를 정하는데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훨씬 쉬웠을 텐데
너무 집중된 나머지 벌써부터 망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억나는 또 하나의 장면은 억울한 벌이다.
조용해야 할 수업시간에, 친구가 실컷 속상이더니 “야, 대답 좀 해” 하길래 별생각 없이
“응, 그래~” 했을 뿐인데, 내 목소리가 컸는지 영어 선생님 귀에 쏙 들어갔다.
“너! 수업 방해했지? 앞으로 나와!”
나는 억울하게도 혼자 벽을 보고 서 있어야 했다. 용서는 없었다.
그때 친구들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 뒤로 목소리 큰 시끄러운 아이로 기억되었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또랑또랑하다는 게, 그때는 장점이 아니라 벌을 받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금 어른이 돼서야 느낀 것이지만, 귀가 잘 안 들려서 목소리가 큰 건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모두 속삭이는데 작게 이야기하면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조바심에 아이컨택을 하며 큰 소리를 내며 대화하는 나를 가끔 발견하곤 한다.
성악을 포기한 뒤,
무대도, 시험도, 공부도 다 실패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다시 그 무대가 그리워졌다.
매일 본능처럼 심심하면 화장실로 들어가 울림을 시험해 보고, 샴푸통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렀다.
온 동네에 퍼져나가는 소리에 부모님은 분명 시끄러웠을 텐데, 새가 지저귀듯 받아들여 주셨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응원해 주셨던 것 같다.
사실 내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됐다.
엄마는 늘 “네가 배 속에 있을 때 포도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도 포도 생각이 간절했고, 아빠는 그 시절 비싼 포도를 매일같이 사 오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래서 내 목소리가 옥구슬 같다고 믿으셨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 나는 사랑받고 태어난 아이였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 때면, 그 사랑이 내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시 하고 싶다
다행히 질풍노도의 시기 중3 때 합창반에 들어가 친구들과 함께 노래할 때에도, 그 마음은 여전했다.
독창이 아닌 하모니 속에서 목소리를 숨겨야 하는 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대 앞에 서고 싶었다.
예전 앨범 사진을 찾아보면 교육청에서 했던 합창대회에 나갔던 사진이 자랑스럽게 남아있다.
발표하다 말이 꼬여 창피를 당하고도, 다음 발표 때는 또 손을 들었다.
체육대회에서 달리다 넘어지고도, 다음 시간엔 여전히 스타트 라인에 섰다.
돌아보면, 나는 용감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의지는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한 번 더 해볼까?” 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그 작은 순간에 꿈이 숨어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