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미 Nov 20. 2023

똥 묻은 개와 잘 지냅니다.

똥 묻은 개 짝꿍 왈 "왈"

인기를 얻고자 시작한 글쓰기/브런치활동이 아니었기에 내가 마음에 내키는 대로, 혹은 내 마음을 풀어내고 싶을 때 글을 이용했다. 처음은 내가 독일에서 보낸 나의 20대 전부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에 와서 이러쿵저러쿵 생기는 불만을 풀어내는 도구로 더욱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많은 불만의 대상들이 있지만 그중 제일 적나라한 타깃은 나와 한집에 사는 피 안 섞인 가족인데, 

문득 내 브런치를 보다 보면 이혼직전의 상황을 연출하는 감정들이 쓰여있어 같은 처지를 겪어본 이들의 공감 혹은 애틋한 마음을 가진 분들의 동정 혹은 남의 불행을 더 잘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을 건드리고는 했지만,,


사실은 잘 지낸다. 

아주.

어쩌면 남들보다 더.


"똥 묻은 개" 이전에도 "정서적 이혼"이라는 글을 쓰고 나서 뒷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관계과 회복되고 마음이 행복하니 글이 영 써지지 않았다. 내 마음이 행복해서 붕- 떴을 때에는 차분한 마음에 고뇌를 되뇌며 나를 반성하고 상대방을 다시 관찰하는 시간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그 상대와 또 한 번 부딪히면 그날 바로 의자를 빼고 앉아 오래전에 로그인했던 브런치에 다시 로그인을 한다. 


그 당시에는 사실, 아니 매번 상대방의 불편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솔직하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마도 다음에 부딪힐 때도 그런 생각이 높은 확률로 들것이다. 그리고 여과 없이 브런치에 끄적끄적할 것이다. 같이 살고 싶지 않음을 티 내면서 말이다. 




최근 들어 이론으로만 알았던 "no pain, no gain"을 몸소 경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육체적/정신적인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어느 정도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성장통임을 뒤늦게 알아채고는 오히려 그 기회를 감사하며 사는데, 이 성장통은 관계에서 또한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듯하다. 관계에서 고통을 회피하면 더 이상의 진전은 없고 고통만 맞땋드리고 그 기억으로 계속 회피를 반복하며 살아가게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말도 안 되는 폭력 등을 제외하고 사소하게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 관계에서의 내게 오는 고통의 원인은 대부분 "나"이니까. 


남편과도 가끔은 약하게, 가끔은 아주 깊은 싸움을 하는데, 오히려 깊은 감정싸움이 오가고 나면 그 감정을 풀어내면서 오히려 더욱 돈독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물론, 자기 분석이 없이 상대방의 티를 보고 원망하는 시간만 있다면 감정이 풀어질 기회도 없겠지만. 하지만 부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 혼인신고서로 묶인 우리가 피보다 약하다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혼인신고서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랑도 들어가 있다.  




 옛날에 "사탄도 신인데 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고 더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할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귀신 들린 점쟁이도 미래를 맞추는 것 보면 어느 정도 미래는 알고 있으나 한 가지 예측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사랑"


신약에 강조되고 강조되는 사랑은 현대시대가 추구하는 물질만능주의 사상으로 재고 따지고들 자면 어쩌면 제일 비합리적, 비이상적, 비논리적이다. 제일 가까이 들어지는 예시는 "자식" 아닌가, 응애하고 태어나서부터 내가 늙어빠질 때까지는 나한테 주는 것이 꼴랑 순수한 마음에 그린 그림이나 편지 등 다 큰 내게는 필요 없는 종이쪼가리 혹은 들어도 효익이 크게 없는 "사랑해" 등뿐인데 내가 고생해서 마련한 주거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한자리 차지하고는 내 일용할 양식을 아낌없이 빵꾸 내도 쫓아내지 않는 이상한 관계. 오히려 그게 좋다며 행복해하는 모순적인 관계이지 않나.


사랑이 없는 관계, 사회에서는 기고 아니고를 재고 따지고,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정의인지 개인의 생각인지 모를 "의"를 주장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고 많이 느껴오고 있었다. 너와 나 1:1의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관계에서 그나마 갖추어야 할 예의도 필요 없는 사회에서는 "선생의 직분이 여기까지인지 저기까지인지, 이게 맞다면 이렇게 했어야지 안 했다면 벌을 받아야지" 등등 피곤한 모든 사회의 말 말 말들은 어쩌면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넘기곤 했고,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그 사람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저 사람이 내 사랑하는 엄마였다면,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면 차마 하지 못했을 모든 행동들은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이어진 부부관계조차 내가 맞고, 내가 이만큼을 더 너에게 해줬고, 너는 글러먹었고, 너는 틀렸고, 너는 나쁜 사람이고 등등 내 몸이 피곤하고 내면의 채워지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 내가 튀어나오면서 사랑은 잠깐 치워두고 나만을 생각하고 상대방을 탓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사랑이 앞섰다면 이 말을 들을 때의 너의 마음, 짜증을 내는 그 모습 이면에 너무 지쳐 쉬고 싶은 마음 등 상대의 마음을 더 헤아릴 텐데.]


알아차리면 다행인데, 아니, 알아차려도 그런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려운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에는 회피 혹은 공격으로 진행이 되곤 한다. 또한 상대도 나와 같은 컨디션이라면 미움과 미움이 만나 폭발을 하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둘 중 하나라도 사랑으로 받아주면 혹은 뒤늦게라도 사랑으로 나를 조금 낮춰주면 남을 찌를 만큼 날카롭게 무장되었던 얼음칼이 단번에 사르륵 녹아버리는 것을 우리 부부는 겪어가며 배워가고 있다. 


이 모든 예시는 다른 여러 부부생활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는 관계로 다 나의 예시이기 때문에 너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잘 지내며 성장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똥 묻은 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