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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Jun 14. 2023

DC, 찢었다......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플래시>, 24에 이르는 방법이 아무리 많아도, 24는 변하지 않아



DC가...... 찢었습니다. 

장엄하고 지루한 히어로물 제작소 이미지였던 DC가, 마블이 올드해지고 디즈니가 PC의 늪에 빠지는 동안 드디어!


가벼워졌고, 청량해졌고, 좀 이따 뭐라고 할지 빌드업할 때부터 토씨까지 예측되는 마블의 유머코드가 식상해진 지금, 신선한 유머코드까지 모두 좋았습니다. 천연 조커 입꼬리(??)를 가진 애즈라 밀러의 연기도 매력도 최고였고요.   


"컴온 바비?" 

"레츠고 파티?"

개봉전야 시사 상영관에서는 이런 유머는 빵빵 터지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아쿠아의 바비걸 너무 옛날 노래인 거죠?



모태솔로 너드남 배리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슈퍼히어로입니다. 어느 날 빛보다 빨리 달리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돼요.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비극을 바로잡기 위해 과거로 달려갑니다. 


Like spidey

플래시의 원작 캐릭터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러모로 이번 단독 플래시 이야기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떠올리게 하는데, 폴짝폴짝 청량하고 밝은 주인공의 분위기도 비슷하고 멀티우주를 차용해 온 방식도 상당히 비슷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과거의 아픔과 히어로로서의 책임을 동시에 떠안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엄마는 나 개인의 우주 안에서는 거의 전부인 존재지만, 세상을 좌지우지할 만큼 큰 힘을 가진 내가 '나의 엄마'를 위해 시공간을 거스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생길까요? 


이어폰을 낀 것 같아

모든 히어로 중 가장 빠르다는 재능은 DC와 마블에서 모두 그렇게 깊이 쳐주는 재능이 아닌 것도 같은데요, 생각해 보면 인간의 본능 중에 가장 강한 부분은 또 스피드 아닐까 싶네요. 이건 되게 근본 같은 거잖아요. 이 세상에 현존하는 가장 빠른 것보다 내가 더 빠르고 싶은. 올림픽의 꽃도 그래서 육상인데! 

배리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면 펼쳐지는 장면은 이어폰을 낀 채 거리를 걸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줘요. 이어폰을 끼면 세상과 조금 떨어져 고립되잖아요. 내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되고. 혼자만 빛보다 빨리 달리기 때문에 혼자 보는 어떤 것, 혼자 달려가서 해결해야 하는 일, 플래시 업무(!)의 외로움이 시청각 이미지로 잘 표현되었습니다. 



아니, 또 멀티 유니버스라고? 

이제 좀 지겨울 시점이고 새로울 것도 없는데요. 뻔해서 재미있게 만들기 어려울 것 같은, 그 어려운 과업을 DC가 해내고 마네요. 철학적이고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시간 여행이 영화나 사골소재가 된 건 인간의 오랜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지구상에서 인과관계를 따져 기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명체인 인간은(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재의 불행 앞에서 본능적으로 그 원인을 따져 묻게 죄고, 자신이 다르게 행동했다면 이런 일이 닥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합니다. 시간여행이라는 가정은 그 회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제 영화계에는 단순한 과거-현재-미래로의 여행이 아니라 멀티버스 개념이 대유행 중입니다.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하던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가지 않은 길의 수만큼 평행우주가 있고 그 우주에서 무수한 내가 살고 있다는 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일까요. 작년 에미상을 휩쓴 영화 <에에올>도 그런 이야기였고, 마블과 DC는 이 개념을 이용해 사람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과거의 히어로를 쉽게 데려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대의 플래시 대 18세의 플래시. 다른 우주의 배트맨과 슈퍼맨.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What will be will be.” 

Everything's Eventual. 스티븐 킹의 말처럼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지는 것"일까요? 


즉 그것은 

"24에 이르는 수많은 방법"

영화 시작점인가, 잘 기억나지 않는데 플래시가 모든 것은 정해진 것 아니냐, 운명이지 않냐고 합니다. 어린 플래시가 풀고 있는 수학문제로 비유되는 운명론. 24를 만드는 과정을 쓰라는 문제를 보고 배리는 여기에는 너무 많은 답이 있다고 하고, 엄마는 "모든 일에 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어떤 길을 거쳐가든 24까지 이르는 것만은 운명이고 바꿀 수가 없는 것일까요. 

24를 만드는 조합은 셀 수 없이 많은데, 24는 정해져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놓고 올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겠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간 속에 갇힌 나 자신

사건의 교차점, 바꾼 사건은  엇갈린 스파게티 면 두 줄처럼 새로운 과거와 미래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를 바꾸면 또 하나가 틀어지는 반복, 계속 돌아가서 너무 많이 만들어버린 과거와 미래. 변수들은 통제되지 않고, 죄책감과 후회에 갇혀 일생을 과거만 바로잡으며 살아가는 또 다른 시공간 속의 나. 

끔찍한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그 과거를 여러 번 곱씹고 바꾸려 하지만 과거는 결국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잃어야 할 것을 잃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깊은 슬픔을 모두 겪어낸 뒤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건가 봅니다.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한 번 시공간을 이동하고 난 후, 틀어지는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고치느라 시간 속에 갇혀버린 배리 자신. 20대의 플래시 대 18세의 플래시 대...... 플래시. 


그만 놓아주자

놓아주어야 할 것들을 그만 놓아주자 과거에 두고 오자. 깜짝 출연한 수준으로 잠깐 나오는 벤 에플렉은 "과거의 상처가 있기에 지금 여기에 우리가 이렇게 있다"라며 플래시의 과거 여행을 만류했었죠. 



마이클 키튼

그 만류를 저버리는 바람에 우리가 만난 게 이렇게 멋진 배트맨이었기는 합니다. 배트맨이 날개를 펼치고 활공할 때, 우리는 갑자기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 우리 기억 속 배트맨은 "날아다니는" 존재였어. 어디선가 나타났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민첩한 존재라고. 우리가 10년 동안 너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간적 배트맨에 길들여져 있었어...... 그리고 칠십을 넘기신 마이클 키튼의 카리스마는 새삼 신선하고요. 아니 진짜 좀 너무 멋있고요. 실제로 30년 전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캐스팅되어 캐리스마를 보여줬던 분인데, 버드맨에서 한물간 히어로 무비스타로 나오셨던 적이 있어서 뭔가 더 와닿은 재등장이었달까요.



DC는 엄마

DC 하면 엄마잖아요? 우리도 모두 우리 엄마 자식이지만 DC 애들은 특히나 엄마 이름이 같으면 싸움도 멈추고 엄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또 엄마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죠......?


"엄마는 다른 시공간에 잘 있어, 우리랑 같이 있지 않을 뿐"

24에 이르는 방법이 다양하게 많다고 했지만, 선술 했듯 답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었어요. '시간 속에 갇힌 괴물'이 된 어느 평행우주의 자신을 본 배리. 토마토를 제 자리에 다시 갖다 놓을 시간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토마토였어요. 애즈라 밀러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떨구는 마지막 눈물은 좀 많이 슬프네요.  


어느 시공간 속에서는 영원히 박제된 행복이

멀티버스를 적극 차용하는 근래의 히어로물. 평행우주 개념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여행을 이해하고 난 후의 순기능은, 지난 시간의 나를 다른 우주(특정 장소와 시간대 속의 나)로 인지하면서 그것을 사라져 버린, 그리워할 대상으로 인지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의 저자 찰스 유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완벽한 타임머신"이라고 했으니까요. 우리는 언제든 기억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시절을 되짚어 돌아갈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과 함께 즐거웠던 시절로 돌아가 회상에 잠길 있습니다. 평행우주 개념에서 이것은 사라져 버리는 역사가 아니라 어느 행복한 우주의 나와 우리로 계속 어느 우주 안에 존재하는 거니까요. 모두가 즐거워야 가벼운 히어로물에 죽음이 필요하다면, 멀티버스 개념을 차용하여 무게를 덜어내면 비장하고 비극적이 되기는 하는 거죠. 


꼭 보세요 

이동진 평론가님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셨다고 영화당에서 말씀하셨네요. 그동안 너무 많이 활용된 타임 패러독스 소재임에도 신선하고 재미있게, 시리즈물을 다 보지 않은 사람도 볼 수 있게 만들어서 피로도가 덜하다, 공식에 잘 맞게 만든 공산품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면에서 우리는 너무 많이 슬픔을 느끼게 된다,라고 말씀하시던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지 클루니

조지 클루니의 등장이 모두를 웃게 합니다. 


덧. 

-스치듯 나오는 갤 가돗 진짜 충격적으로 아름다워요. 언젠가부터 대형 영화에서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역차별하지 말고 예쁜 사람도 좀 큰 화면에서 자주 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벤 에플렉의 배트맨은 찡그린 가면을 쓰고 있고,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보통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예전에 그랬기 때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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