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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Dec 04. 2023

사카모토 류이치를 기억하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건 진짜 나쁘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일 자체가 힘든 게 아니고 사람이 힘들다’는 뻔한 얘기를 많이 하고 듣는데, '사람이 힘들다'라고 하면 마치 누군가 악마 같은 절대악이 존재해서 그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때문일 것만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사무적으로 팩트만 주고받으면 뒤끝 없이 끝날 일이, 어떤 사람과 내가 어느 정도 개인적으로 얽혔기 때문에 힘든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절대악은 그렇게 쉽게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악이라는 건 또 그 자체로 어떤 아름다운 완전체다. 회사에서 우리를 짜증 나게 하는 건 그런 완전체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일관성 없는, 더없이 인간적인 존재들이다. 그는 주로 내가 보기에는 일을 개떡같이 하는데 인간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어느 가정에서는 소중한 엄마 아빠이자 가장이거나 남의 집 귀한 딸 아들인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실수한 사람은 메신저 한 마디면 끝날 용건을 굳이 와서 얼굴 보고 말하려고 한다.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 얼굴을 보고 나면 괴행과 끝없는 실수를 더 이상 비난하기가 어려워진다. 대개 만나서 알게 되면 그는 그냥 자신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한 명의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진리는 절대악이 존재하는 것보다 소시민들의 회사생활에서는 더 악재다. 너 나 우리 모두를 포함한, 이 일단 알고 보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지면 자기 주변에 감정적으로 좋게 얽혔거나, 혈연이거나, 좀 더 자주 얼굴이라도 봤거나 오래 접촉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다음 벌어지는 건, 자신에게 좀 더 가까운 사람을 지키기 위한 의도로 시작된 아주 작은 가해와 뜻하지 않게 곁가지로 크게 뻗어나간 피해의 발생이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다보면, 너와 내가 얼굴 한 번 본 사이거나 서로 안다는 게 큰 사회 전체에서 과연 늘 좋은 일이기만 할까, 공정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져보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그런 발상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더 가까운 누군가를 사랑해서 배려하고 위할 때, 자신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별 거 아닌 변호라고 생각하고 행하는 편들기, 그 '내 사람' 바운더리에서 배제된 바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 갈등이 일어났거나 나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사랑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쁜 일이 아무에게도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을 세상은 없다. 천국에서도 그러진 않을 거다.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면.


[스포일러가 있답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을 진실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짓말도 없다. 모두가 마음속에 삼천 원 하나와 (상처 하나쯤과) 말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다치게 한 거짓말 뒤의 비밀을 품고 산다. 세상 너무 아픈 비밀.


내 아들 A가 반 친구 B를 괴롭힌 것이 진실이라면 내 아들 A는 처벌을 받을 것이고 내 아들 A가 거짓말을 하여 다른 사람이 누명을 쓴다면 그 사람이 다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진실과 거짓말은 누군가에게 호재이거나 악재다.

이보다 더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가해를 하고 있는 걸 나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아무렇지 않게 그의 성정체성에 대해 다른 경우는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남자답게”라는 말을 쉬이 쓰는 호리 센세처럼.


사회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고 태도가 단정하지 못한 선생님, 한부모가정의 아이, 나쁜 소문 속에 싸여 표정 없는 교장. 어떤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이 일이 누구 탓인지 추적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우리가 본 일부의 정보 이외의 경우는 쉽게 상상하지 않은 채 단정한다. 누군가의 일면만 보고 편견을 가지는 태도에 대해 어떤 질책도 하지 않지만, 스스로 현타 느끼며 깨우치게 만드는 지능적이고 정교한 각본.  

76회 칸 영화제에서 ‘괴물’이 각본상을 받았을 때, 각본을 쓴 사카모토 유지는 “단 한 명의 외로운 사람을 위해 썼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섞여사는 곳에서는 무지와 부족한 배려, 내 사람을 우선시하는 태도 등으로 인해 늘 누군가 상처받는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가해자는 뚜렷한 절대악이 아니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절대악이 될 만한 인물도 못 된다. 누군가에겐 좋은 한 사람인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자녀 거나 애인이거나 친구일 뿐.


[결말을 암시하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계는 없고, 특히 아이들의 세계는 더 깨질 것처럼 약하다.


커다랗던 동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석양이 깔리기 전까지 충분히 넉넉하게 느리던 하루와 시간. 아이들에게는 아직 세상 모든 게 처음이고 의미가 있어서, 그에게만 압도적으로 큰 그의 작은 세계는 쉽게 파괴된다.


다시 태어나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길, 담장으로 막힌 곳도 비 내리는 밤도 없는 밝은 세상이길, 꽃 이름을 줄줄 외워도 괜찮은 세상이길.



-사카모토 류이치를 기억하며-


놀랍게도 '브로커'를 제외하고 본 첫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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