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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Dec 20. 2023

나의 이야기는 내가 쓰겠소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전쟁 중에도 소년은 자란다. 무덥고 긴 여름이 끝나면 훌쩍 무릎이 높아져서 돌아오는, 2학기 개학을 맞은 현대의 아이들과 똑같이. 여름의 소년은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도중에도 자란다. 전쟁통에 어린아이도 반듯한 어른처럼 버티며 살아가야 하던 시대, 안 그래도 세상이 소용돌이치는 어린 시절에, 아이는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을 마주한 역량으로는 받아들이기 버거운 가정사를 겪는다. 



"넌 사실 아가씨(새엄마)가 없는 게 좋잖아"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마히토를 대하지만, 스르륵 낮잠에 든 마히토의 모습을 바라볼 땐 하 차갑고 묘한 표정의 새엄마. 하지만 이 상황은 새엄마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언니가 죽고 관행에 따라 형부의 처가 되었지만 자신을 밀어내는 속 모르는 아이까지 친아들처럼 챙겨야 하고 언니를 잃은 슬픔도 시대의 아픔으로 삼켜야 하는 개인. 결국 새엄마는 사실 없는 게 좋을 자신의 존재를 저 먼 세계로 숨기려 한다. 


마히토도 마찬가지다.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처럼, 그는 자아가 좀 더 분명해도 누군가 상처받지 않을 세계로 도피한다. 

아득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난 어린 시절의 엄마. 하나씩 실마리를 찾는 여정을 통해 그는 성장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널 낳은 건 행복이었어"

그래 우리가 견디기 힘든 시간을 그럭저럭 견디는 건 종종 뒤에 두고 온 소중한 기억 덕분이기도 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준 어떤 무형의 유산이 나에게 남아 있어서이기도 하니까. 소년은 어떻게 살 것인가. 


머리에 스스로 낸 흉터에 새살이 돋아 점점 차오르고 내 회복력이 상처를 여밀 무렵 아이는 다시 차가운 원래 세계로 돌아온다. 

그는 새엄마와 전처럼 표면적인 전략적 제휴를 유지하며 어른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기를 선택했으니까. 

어른이 되는 과정은 창조하고 공상하는 어린 시절의 판타지 세계를 버리는 일. 어른이 매일 마주하고 해결해야 하는 지루한 루틴과 상충하니까. 


"너 저기서의 일이 다 기억나니? 그 세계에서 들고 왔어?

아 그 정도는 금방 잊어버리니까 괜찮아"

우리가 저 세계에 두고 온 건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이 아니다. 어른의 삶에서 그 기괴하지만 행복한, 내가 창조한 세계를 떠올리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자신다워질 수 있는 모멘트가 오면 '그건 나니까'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을 줄 알고 그 세계를 떠올리는 걸 미루며 어른의 삶을 살겠지만, 찾지 않는 세계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반짝반짝하던 창조주의 능력은 어른이 되면서, 저 세계에 신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사라진다. 



이 영화를 볼 것인가. 백일몽에 빠져 지낸 유년기를 보낸 사람에게는 그냥 어릴 때 하던 공상이나 꾸던 꿈, 머릿속에서 혼자 만들던 애니메이션이랑 비슷할 영화다. 그런 자작물들은 대개 아이 의식의 흐름대로 논리를 거스르고 허무맹랑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꼭 어느 대목에 이르면 허무맹랑한 비주얼이나 인과를 보일 때가 많아서 아이들의 공상과 닮았다고 늘 생각하는데(다소 호러스럽고 어두운 부분까지), 이 영화는 그런 황당무계한 흐름이 극대화되었다고 볼 수 있어서 전작들에 비해 호불호가 유난히 나뉜다. 



"나를 닮은 자는 살고 나를 배운 자는 죽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애플의 아이패드가 처음 일본에 보급되었을 때, 지하철에서 모두가 판때기를 들고 손가락을 벌렸다 오므려가며 시각 미디어에 심취해있는 모습에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TV도 바보상자라고 바보 제조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으니 당연하며 뻔한 지난 세대의 반응이기도 하고, 될놈될이라 와중 어떤 환경에서도 창의적으로 자랄 놈은 창의적으로 자라긴 할 것이다. 다만 나 역시,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극소수 창의성 대장들을 제외하면,  A to Z 쌩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을 기르려면 어린 시절 독서를 통한 공상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 만들어진 시각적 결과물을 하나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머리로 그리고 만들어내본 경험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말 다르다. 정말 단편적으로는 내 세대도 미디어에 꽤 익숙한 세대이긴 해서, 그보다 좀 앞선 세대만 살펴봐도, 아무리 공부 안 한 놈이어도 놀 거리가 많지 않아 만화책이라도 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개발자면 코드를 복붙하지 않고 직접 써본 사람도 많고, 부족한 부분을 구매나 보급된 기술로 채우기보다 자신의 잔머리로 채워온 사람들이 많은 느낌인데,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상상과 기획이 필요한 분야에서 이 연령대의 사람들이 발휘하는 창의성은 꼭 나이가 많아서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야자키 하아오 역시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오며 세상을 바꿔온 사람인데, 자신만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엿보이기도 하고 달라진 세상에서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한다. 



거장과 유명인의 억울한 숙명은 그들보다 부족한 식견의 절대다수 범인들이 자신의 좁디좁은 시야와 가치관 내에서 이해하고 왜곡한 모습으로 세상에 남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자신의 의도와 달리 멋대로 기억되곤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거장쯤 되면, 스스로의 전기를 스스로의 관점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그럴 수 있는 시대니까. 내 삶을 남이 멋대로 해석하고 기록하게 둘 것인가. 한 세기를 지내온 거장들은 요즘, 스스로의 이야기를 스스로의 관점에서 스스로 쓰기 시작했다. 요즘의 대세다. 그런 면에서 작년에 본 모든 영화 중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 '더 파벨만스'가 가장 좋았고, 이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눈과 입으로 정리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좋았다. 군수물품 공장을 운영하며 너무 직접적으로 전쟁에 기여하는 아버지를 둔 입장에서 그를 경멸하면서도 결국 그의 녹을 먹고 자랐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던 마음의 상처 같은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자전적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 묵직한 가방이 들썩거리며 새 탈것을 흔드는 감각으로부터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물처럼 느껴질 영화. 오랜 시간 나에게 내가 잃어버린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준 감독으로부터, 그의 인생을 스스로 쓰는 의미의 자전적 이야기를 비로소 들어볼 수 있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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