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윤리적 역할
신년에도 넷플릭스의 파죽지세
신년에도 넷플릭스의 파죽지세는 사그라들 줄 모른다. 블랙미러 특별 편을 공개하며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시도(게임처럼 영화의 결말을 선택하게-선택할 수 있다고 관객에게 믿게 만드는-하는 형식 도입)를 하면서 찬사를 이끌더니, 그동안 비난받아왔던 완성의 디테일이 떨어지고 만들다 만 것 같은(넷플릭스 자체 영화는 그동안 기획은 참신하고 좋으나 막상 시청하면 좀 헐거운 느낌의 영화가 많았다) 영화들을 졸업하고 보다 디테일에 신경 쓴 영화를 만들기로 한 모양이다. 최근 올라온 넷플릭스 자체 영화들 중 A급 배우 산드라 블록을 캐스팅하여 만들어낸 참신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인 버드 박스는 매우 눈여겨볼 만하다.
현지시각 기준 2018년 12월 30일, 넷플릭스 공식 트위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무비 <버드 박스>가 공개 일주일 만에 시청 계정 4500만 명을 돌파했다"라고 계정에 글을 올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팬이라면
영화가 존 크라신스키의 <콰이어트 플레이스>와 많이 비교되고 있는 것 같다. 결말에서는 나이트 샤말란의 <해프닝> 느낌도 좀 느낄 수 있다. 온갖 아포칼립스 영화의 장면 장면 짜깁기처럼 느껴진다는 평가도 심심찮게 보인다.
외부의 위험에 벽을 두르고 공동체를 형성한 인간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새 사회를 운영하고, 그 안의 온갖 군상 진상 발암 캐릭터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나, 새로 들어온 낯선 이가 위험요소를 품고 있는 것은 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설정일 것이다. 하 수상하고 하 어려운 시대에 공교롭게도 새 생명을 잉태하고, 완벽한 아날로그 상태에서 위험에 노출되어 출산을 해야 하는 상황 등도 그렇다. 마지막까지 가장 인류애를 실천하던 따뜻한 캐릭터의 희생으로 나머지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이어지는 절정 부분도 마찬가지. 그럴듯한 아포칼립스 상황을 가정하였으나 그 악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그저 인간 내면의 나약함이나 어떤 초현실적 존재라고 불충분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는 아몰랑 작전 시전에도 우리는 익숙하다.
정말 혁신적인 영화가 아닌 이상 이제 이런 장르 영화에서 기시감 느끼는 일과 누가 언제 죽겠구나 하는 예감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일은 다 있는 것이고, 나는 이 영화를 꽤 신선하다고 생각하면서 봤다. 악의 근원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런 류 재난 영화의 악이라고 해 봐야 내면의 악령이거나 분노 바이러스거나 정부의 생물 실험이나 외계에서 온 바이러스거나할 텐데 뭐 설명을 듣지 못하면 어떠랴. 이 영화는 장르 영화로서도 재미있고 넷플릭스 영화치고는 디테일이나 뒷심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잃지 않고 재미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좋아하는 넷플릭스 가입자라면 시청해도 거의 후회가 없을 것이다.
자칫 힘 빠질 수 있었던 영화를 꽤 괜찮은 영화로 완성한 것은 산드라 블록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산드라 블록은 왜 반백살인데 전혀 늙지 않으며 왜 평범한 장면에도 가슴이 찡하게 만드는가. 조난 당하기 전문 배우로서 그래비티 때는 영화와 배우가 좋은 거랑 별개로 산드라 블록 징징대는 목소리 듣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여기에서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다 멋있었다. 모성애와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장착한 주도적인 캐릭터라서 좋았다.
결말: 미디어로서의 윤리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넷플릭스
산드라 블록이 "보이! 걸!"로 아이들을 부르는 게 웃기지만, 나는 산드라 블록이 아이들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행위를 단 두 명의 아이 중 남의 자식과 자기 자식의 구분을 두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았다. 정붙이고 키우기 힘든 세상이니 필요 없는 감정을 분리하고 생물학적으로만 구분하려는 것이다. 아이들을 내 자식 네 자식의 구분 하지 않고 그저 어른으로서 보호하려는 것.
안전지대로 가기 위해 급류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일행. 누군가는 눈을 뜨고 노를 제 방향대로 젓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노를 젓는 어른조차 눈을 떴다가 감염된다면 세 명 모두 살 가능성이 제로가 되므로 노 젓는 어른을 제외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눈을 뜨고 방향을 봐야 했다. 여기서 두 아이에게 어른인 존재이자 두 아이 중 한 명의 아이에게 엄마인 존재인 산드라 블록은 "그냥 우리 모두 다 보지 말자"라는 선택을 한다. 세 사람은 어렵게 마지막까지 미지의 악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협력으로 극복해내고 안전지대에 당도한다. 눈을 뜬 사람들이 모두 감염되는 세상에서 안전지대는 놀라우면서도 당연하게, "시각 장애 학교"였다.
소통이 가능한 커뮤니티 안에 묶인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다. 모두가 수화와 점자에 능하다면, 글자를 볼 수 없는 사람도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장애인이 아니다. 네 자식 내 자식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한 커뮤니티의 어른으로서 똑같이 아이들을 보살핀다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까닭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사회에서 낙인 찍히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가 신선한 때깔과 참신한 아이디어에 비해 막상 보다 보면 몰입감이 뭔가 떨어지고 퀄리티가 덜 돼 보이는 느낌은 아직도 있지만,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가려는 시도는 너무 티 나서 가끔 촌스러울지언정 필요한 역할이라 응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