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이 단어가 내 삶에 등장한 것은 아마도 20대 중반쯤의 일이다. 갑자기 등장한 공포심. 사람을 대면할 때 느껴지는 압박감이 그땐 별거 아니겠지 싶은 증상으로 한두번씩 일어났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전화가 왔다는 핑계로 이 자리를 사진에 남기려고 카메라를 가져오겠다는 핑계로 잠시 열을 식혀야 했다. 그 증상은 점점 커져 이제 누군가 내 자리에 찾아와 말을 거는 것도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도 창가가 아닌 자리에서 버스를 타는 것도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사람을 알게되는 것도 어려워 하게 됐다. 그곳의 쾌적한 상태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에 가는 것도 나에게 집중되는 자리에 가는 것도 금세 벗을 수 없는 옷을 입는 것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아니라면 내 비밀을 알아채는 게 아닐까 싶어 친해지는 과정 자체가 두려웠다. 최대한 사람을 피했고 그럴 수 없다면 내 장애를 이겨낼만큼의 사람인지 따져댔다.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해왔던 것일까. 나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질 때쯤 난 직급의 권력과 실력에 대한 명성을 얻게 됐다. 저 사람은 뭔가 달라 그런데 그래서 일을 잘하나봐 같은 아슬아슬한 방정식을 얻어 냈다. 창의성을 인정 받고 조금은 달라도 된다는 허용치를 획득했다. 만약 이 사회가 사람의 개성에 조금 더 관대하고 열려있는 분위기였다면 어땠을까. 난 이 사회의 답답했던 분위기를 탓해 본다. 80년대의 그 끔찍했던 전체주의를 혐오한다. 그 미열처럼 지속됐던 압박감이 마치 저온화상처럼 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었다고 확신한다. 아직도 조금 다른 사람과 또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마녀사냥은 계속 된다. 그들의 고통어린 외침을 볼 때면 내 과거의 통증이 떠오른다. 그들의 차별이 내 머리 속에서 과거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왜 사람은 사람에게 다정하지 못할까. 이런 얘기가 단지 간단한 푸념이나 불평이 많은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조차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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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응급실에 다녀왔다. 38.5도였다. 무엇보다 응급실까지 왔는데 아무 것도 아니면 어떻게 하나 싶었던 걱정이 해결됐다. 난 명백한 환자였다. 응급환자. 여러명의 의사가 차례대로 다녀갔다. “언제부터 열이 났어요?” “다른 질병이 있진 않나요?”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이스팩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링겔을 맞았다. 주변엔 소위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다. 왜일까 궁금했다. 한 사람은 손이 부러졌다. “Is this serious?”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아마도 일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 같다. 또 다른 가족은 아이가 아직 검사할 조건이 되지 않았다는 안내를 받았다.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 지나서 소리 지르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가족 사이에서도 문제였던 것 같다. 동행한 가족들은 그 악다구니를 말리지 못했다. 결국 팔과 다리가 결박됐다. 머리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는 기괴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 아아아악’ 그건 고통의 호소라기 보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신호 같았다. 멀리까지 들리길 바랬던 것 같다. 아무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젊은 여자가 119에 실려 왔다. 목 깁스를 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도 나타났다. 젊은 여자는 잠옷을 입은 채였다. 침대에서 떨어진 걸까. 나는 생각했다. 목 깁스는 풀었지만 허리와 목을 꼿꼿히 세워야 했기 때문에 자세가 공간의 분위기와 달리 매우 우아했다. 남자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 쯤으로 보였다. 40대 초반의 엄마와 함께였다. 엄마의 말투와 차림에서 학식이 느껴졌다. 아이는 엄마의 관심에 꽤 기쁜 것처럼 보였다. 주사가 아프지 않다거나 안 아픈 것도 같은데 아프다는 식의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아이와 나는 눈이 몇 번 마주쳤다. 요즘 엄마와 아이들은 저런 느낌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엄마가 떠올랐다. 어느 해의 어린이날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마음 먹고 어린냥을 했었던 적이 있다. 선물도 얻고 하루종일 엄마의 관심도 얻었다. “독감은 아니네요. 그냥 감기에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었다. 체온도 37.9로 떨어졌다. 2시간쯤이 지났다. 난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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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로 괴로울 때 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두려움을 발견하곤 한다. 압박감. 눈빛. 강요같은 이미지의. 그건 마치 내가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만한 일들, 아마도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있을지 예를 들기도 힘든 어떤 상황을 가정한다. 그러니까 난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상황을 상상하면서 괴로워 한다. 그 상상 속의 이미지에는 아마도 아빠의 얼굴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압박감. 눈빛. 강요. 그 엄청난 고통은 아마도 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것 같다. 그걸 마주하려고 시도할 때 난 어렸을 때 느꼈던 어떤 쓸쓸한 기분을 마주한다. 그건 벌써부터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의 기억이다. 감기몸살처럼 끙끙 앓고 있는 기분. 생각만으로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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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프고 허리도 뻐근하다. 모든게 해체된다. 그리고 스스로 치유된다. 난 펼쳐지고 다시 아문다. 상처받은 살이 다시 봉합되고 부서진 뼈가 다시 붙는다. 난 다시 아물기 위해 부서졌고 부서지기 위해 태어났다. 이 과정에 어떤 영롱한 의지, 방향성, 움직임, 그 멈추지 않는 걸음으로 우린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삶은 투쟁이고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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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아프니? 응. 난 무얼 키워냈어. 뭘? 아이. 날 죽일 아이. 그 아이는 내 뱃속에서 크고 결국 날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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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자. 춤을 추듯이 살자. 손끝을 곧게 펴고 내 온몸의 기운을 그곳에 싣자. 우주의 기운을 느끼자. 그리고 미소 짓자. 우아한 발걸음으로, 사뿐 또 사뿐. 가볍게 그리고 정확하게. 살자. 우리 그렇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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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단체문자를 보고 있었다. 스크롤을 하다가 내 이름이 눈에 띄어 읽었다. ‘걔 있잖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애’ 재수없다는 말이 이어졌다. 누군지 기억 나지 않았다. 마르고 안경을 꼈다. 한명이 맞장구를 쳤다. 그 애는 또렷하게 기억났다. ‘난 친한줄 알았는데’ 난 생각했다. 삭발머리에 작고 단단한 체구를 가졌다. ‘나랑 축구도 종종 했잖아’ 그 애가 서있었다. 층층히 돌계단으로 둘러쌓인 운동장이었다. 삭발머리에 단단한 체구의 그 애는 45도쯤 비스듬히 서있었다. 네모난 얼굴엔 여드름 자국도 간간히 보였다. ‘왜 그랬어’ 내가 말했다. 다른 친구들이 떠올랐다. 다른 친구들은 돌계단 속에 있었다. 운동장 한켠에 쌓인 흙더미 속에 있었다. 철봉이 있다. 하얀 기둥에 쇠철이 가로지른. 애들 손에 오랫동안 문질러진 쇠철은 검고 반질반질했다. ‘난 그게 싫었어’ 안개가 꼈다. 순간 모든게 얼어버렸다. 폐허같단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꿈을 꿀 수가 없었다. 다른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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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게 의미가 있을까. 몸이 아프고 나서 많은게 달라졌다. 글도 그저 내 욕심일 뿐이었나. 거기서 뭘 단련하려고 했던걸까. 제법 쓰던 시란 것도. 머리가 어지럽다. 동시에 모든 것이 뚜렷하다. 몸이 아픈데 또 세포 하나하나에 힘이 난다. 발악이란게 그런 것 같다. 늪이란게 그렇다. 가라앉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무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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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폈다. 이 연기가 내 몸에 흘러 들어가 무슨 작용을 할지 난 잘 모르겠다. 운 좋게 정화될 수도 있고 아니면 미세한 물질이 남아 어딘가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다. 피가 흐르고 수억개의 세포가 죽고 사는 이 몸은 나의 것이라기 보다 우주의 한 부분이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이 난 수없이 많은 별들의 한 조각조각이고 유한하다. 난 이 복잡한 집합체의 작용을 어느 하나 이해하거나 예상할 수 없다. 담배를 폈다. 이 작은 사건이 내 미래의 운명을 바꾼 건 아닐까.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