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나오라 Apr 28. 2023

그런데 정말 묻고 싶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는 죽어서도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설마 만물의 이치와 만사의 지혜를 알고 계신 신이 그렇게 편협할까.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감당한 인간에게 조악한 잣대를 들이대며, 앞뒤 맥락을 잘라낼 분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내일, 내가 다시 좋아지고 싶어 - 황유나 -






한쪽에선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데 한 편에선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있다. 한 세상에서 어찌도 이리 다른 풍경이 나올 수 있을까. 그래서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동면의 양면처럼 한 끗 차이인 생과 사.


지금은 무교지만 예전에 신앙생활을 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제일 큰 죄라고 했다. 그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없다고. 그래서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스스로 생을 끊어버릴 수 있는지. 어떤 마음이어야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하지만 이걸 과연 용기라고 표현되는 일일까. 사전에서 용기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재라는데 죽는 걸 겁내지 않은 기재라고? 죽는 게 어떻게 두렵지 않을까 겁나지 않을까. 그 마음이 감히 가늠조차 되진 않지만 아주 살짝 헤아려 볼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 정신이 이렇게나 무서운 거구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아주 오래전 먼 친척분 중에 한 분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따지고 보면 먼 친척뻘이지만 가까운 곳에 계셨기에 왕래가 있던 집이었다. 부모님은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우리는 집에 남아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렸고 자주 보지도 않을뿐더러 어른들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런가 보다. 어쩌다 돌아가셨을까. 그냥 그 마음이 다였다. 시간은 흘렀고 내 기억에서도 지워져 갈 때쯤 우연히 그날의 상황을 듣게 됐다.


돈 문제로 부부 싸움을 크게 하던 중 도저히 못살겠다며 창문을 열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내던졌다고. 아무리 싸움을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했지만 또 그 사정을 들으니 한숨이 연신 쉬어지고 답답함에 가슴이 조여왔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무엇보다 꽤 오랜 시간 싸움은 잦았고 형편은 점점 어려워져 말도 못 하게 힘들었었다고 들었다. 약까지 복용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한계치에 다다랐던 거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스스로를 물어뜯은 셈이다.



© breakfast_on_jupiter, 출처 Unsplash



구구절절한 속사정을 다 풀어내고 싶지는 않다. 고인에 대한 예의는 지키고 싶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을 이해하게 됐다는 거다. 이해라는 건 사실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런데 정말 묻고 싶다. 후회되지 않느냐고. 그곳에선 맘 편히 계시냐고 말이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는 소식이다.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조의를 표하는 마음은 안타까운 마음이 커서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생을 어두컴컴한 곳,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 그 세상에 제 발로 들어간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드리고 싶다. 그래서 그곳에서라도 편히 쉬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이유를 찾는 중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