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진 May 15. 2021

같은 성별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일까

영화를 쓰다 8 - 「패왕별희」, 자기애와 동성애의 경계에서

  

 아이의 마지막 순수함이 끝자락에 다다라 떨어질 무렵이었다. 예쁜 소년 하나가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금지된 성벽 모퉁이의 거대한 각루 아래에서 흙먼지가 바스라졌다. 북경식 옛집이 늘어선 후퉁 골목 어귀에서는 소년 경극 단원들이 남기고 간 달콤한 탕후루 조각들이 구슬처럼 알알이 흩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매를 맞고 누군가는 목을 맸다. 누군가는 부드러운 혓바닥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썹을 세밀하게 핥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막이 내린 경극 무대 뒤편의 모습이 소년에겐 그리 낯설지 않았다.

 

예쁜 소년 하나가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을 쓸쓸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성벽 너머 고즈넉한 누각이 올려진 새벽 호숫가에서는 소년들이 안갯속으로 힘차게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성대와 굵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내뱉는 그들의 순수한 맨얼굴은 잔잔한 호수에 떠 있는 연잎 같았다. 힘 있는 음가 속에 숨겨진 소년들의 투명한 구슬은 그 나라에 사는 어느 소녀들의 손톱보다도 더 여리고 섬세했다.
 평생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하느라 자신의 민낯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소년은 잃어버린 자신의 은밀한 곳을 찾기 위해, 호숫가 누각 아래에 신사(神社)처럼 끝없이 이어진 나무 통로를 하늘하늘하게 달음질했다. 소년의 얇은 다리가 가녀리게 흔들렸고 그가 달리는 자리마다는 발자국 대신 빨갛고 검게 번진 눈물자국이 화려하게 울려 퍼졌다.

 

소년은 잃어버린 자신의 은밀한 곳을 찾기 위해 화려하게 달음질했다.

 
 베이징을 여행하는 이방인이 되어 「패왕별희」 경극을 무대에 올리며 소년은 상대역인 초패왕을 순수하도록 좋아했다. 이방인으로 분한 소년 우희는 자신과 같은 이방인인 패왕을 자기도 모르는 감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가면 뒤에 가려진 낯선 패왕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어 버린 강물 속으로 잘려 침잠하는 아이의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그에겐 거추장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서 끄트머리처럼 매달려 있던, 소년의 마지막 순수함은 이제 패왕을 떠나 소년 안에 있는 또 다른 소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소년과 똑같이 생긴 계집아이였고, 십수 년 간 그의 거울 속에 일렁이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낯설던 마음속 이방인이었고, 가끔씩 거울 속에서 불쑥 나와 아이의 마음속을 헤집던 자화상이었다.
 그는 패왕도 아니고 다른 등장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계집아이로 분한 우희였고 소년으로 분한 계집아이였다. 거울처럼 똑같이 생긴 눈 속에 비친 서로의 은밀한 곳을 바라보며 소년은 이 아이야말로 좁은 경극 무대 같은 넓은 베이징 속에서 함께 이방인이 되어 춤추고 싶은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소년의 순수함은 소년 안에 있는 또 다른 소년에게 향하고 있었다.

 
 같은 성별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일까. 거울에 담긴 소년의 가장 은밀한 곳을 사랑하는 것은 죄일까. 계집아이처럼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사랑하는 사내아이는 죄인일까. 소년은 샘물에 일렁이는 계집아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낙하하는 물방울이 아이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년이 흘린 비극과 자책의 샘물들은 골짜기에서부터 흘러 점점 거센 물결로 휘돌더니 어느새 해하(海河)의 강이 되어 그의 마음 한가운데를 가르고 있었다. 강을 등지고 펼친 천막 같은 경극 무대 위에서 두 명의 우희 속 두 명의 소년은 서로를 격렬하게 어루만졌다.

 

소년은 샘물에 일렁이는 계집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궜다.

 
 자정이 되자 서풍이 불었다. 천막 너머 사방에서는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노랫가락을 듣고 서로는 결심한 듯 마지막 잔을 올렸다. 해하(海河)에서 솟아나는 눈물이 애가를 타고 술잔에 졸졸 흘러내리는 순간이었다.

 소년과 우희는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눈망울에 그윽한 슬픔과 결의가 터질 듯 맺히려던 참이었다. 서로의 눈에 비치는 그들의 은밀한 곳이 점점 하나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두 소년과 두 자아의 맥박이 점층적으로 가빠져 가고 있었다. 최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절정을 향해 치달으며, 두 사람의 몸을 더듬으며 올라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자기애와 동성애가 합일되는 그 카타르시스의 순간에 소년은 우희의 목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우희는 소년의 목을 사무치게 껴안았다.

 빨갛고 검은 화려한 물줄기가 정맥처럼 파르르 솟아났고 소년의 눈과 우희의 볼이 아름답게 번지고 있었다. 곧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버릴 뜨거운 용암처럼, 그들은 붉은 마그마에 젖어 처연하게 스러져갔다.

 

자기애와 동성애가 합일되는 절정의 순간에 그들은 서로를 껴안았다.

 
 소년과 우희의 마지막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퇴적물처럼 쌓여,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듯 옛적 초나라 노래의 곡조로 추억처럼 새겨졌다.

 그렇게 어느 슬픈 노래 하나가 해하(海河)의 물소리와 뒤섞여 음유시인의 읊조림을 타고 새벽 호숫가에 아득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