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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May 22. 2021

교사는 교육을 바꿀 수 있을까?

영화를 쓰다 10 - 「죽은 시인의 사회」, 믿음으로 심은 교육의 씨앗

 

1.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오역이다?

 

 「Dead Poets Society」, 이 영화의 원제이다. 제목에서 'Society'는 원래 문맥상 '사회'라는 뜻은 아니다. 영화 속 학생들이 결성한, 죽은 시인의 '동아리, 서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삼십 년의 세월 동안 원제와는 다른 의미로 존재해 온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역처럼 조금 다르게 해석해도 좋다는 느낌이 든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생각하니 교육과 사회의 다양한 쟁점들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그것들의 본질적 질문에 대해 더 가치 있는 해답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원제와는 다른 의미로 번역한 제목이 머릿속에 굳어지니,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교육 현실이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라는 것이 잘 와닿는다. 사회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학교 교육을 받는다. 학생인 사람도 있고, 학생이었던 사람도 있다. 곧 학생이 될 아이들도 있다. 학교 안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학교 밖에서 부모라는 교사로, 또 누군가의 인생의 스승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교육이라는 단어로 묘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을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죽은 시인의 '동아리'나 '서클'이라고 정직하게 번역했다면 'Dead Poets Society'에 '참여했다'라는 동사로 표현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이기에, 우리는 영화 같은 교육 현실인 'Dead Poets Society'를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과 시(詩)가 사라져 가는 사회, 한 송이 장미꽃 같은 삶의 목적이 말소된 서울 같은 대도시 한복판 어딘가에 '죽은 시인'들은 살아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천사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은밀하고 위대하게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죽은 시인들과 한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존 키팅' 같은 선생님, '닐'과 '찰리', '녹스'와 '토드' 같은 학생들이 바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죽은 시인'이다. 그들을 닮은 선생님이나 학생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우리도 죽은 시인들과 만나 본 셈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를 보며 그들의 창의적인 교육혁신과 튼튼한 교육철학을 동경하고 그들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어쩌면 언젠가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있는 죽은 시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 '죽은 시인의 사회' 속에서 신선하게 살아 숨 쉬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과 예술이 사라진 사회에서도, 죽은 시인들은 살아 숨 쉬고 있다.

 

2. 끈질기게 되돌아오는 교육의 구겨진 페이지들

  

 '존 키팅' 같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학생과 교사가 학교에서 바로 서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모두들 슬픈 홀로 서기인 것이다. '키팅' 선생님처럼 교탁 위에 자신 있게 올라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줄기차게 찢어버린, 그래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말소된 페이지들도 결국 슬픈 교육현장으로 끈질기게 되돌아왔다. 다시 그 희망 없는 교육의 페이지를 읽으며 그들은 'Litost(후회나 비탄, 절망의 복합적 감정을 의미하는 체코어)'를 느꼈을 것이고 동주 시인처럼 고개를 떨궜을 것이다.

 

 학교교육은 언제나 대학과 입시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좋은 성적, 좋은 생활기록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인생…. 사실 학교교육 자체는 성적과 대학입시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표방하며, 학생과 교사의 희망찬 꿈을 지향한다. 교과서와 교육과정 성취기준, 그리고 교육정책들은 영화처럼 이상적이다. 학생들에게 마음껏 꿈을 꾸게 해 줄 것만 같고, 교사에게 마음껏 꿈을 가르치게 해 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 꿈을 꾸고 싶은 학생과, 꿈을 꾸게 해 줄 교사와, 꿈을 꿀 침대가 되어 줄 수업은 교육 현실의 벽에 막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이 사회는 꿈을 꿀 수 있는 수업을 철저하게 반대한다. 젊은 교사는 의욕을 가지고,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처럼 '조금 다르게 해석한' 수업, '키팅' 선생님처럼 '한 발자국 삐딱하게 바라보는' 특별한 교육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현실에 지쳐 결국 늙고 무능한 교사로, 편하고 배부른 교사로 내려앉고 만다.

 

 위에서 학교교육의 지향점이 '영화처럼 이상적이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학교교육의 모습은 여느 영화처럼 이상적이지 않다. '키팅' 선생님의 교육혁신은 학교와 학부모의 거센 항의를 이기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꿈을 향한 학생들의 도전 또한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무산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영화에서 그려지는 이러한 교육 현실이 우리 사회의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이상한 교육'과 너무나 닮아있기에, 우리는 영화를 감상한 뒤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깊은 울림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과 교사가 학교에서 바로 서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3. '키팅' 선생님이 믿음으로 심은 교육의 씨앗

 

 자신의 모교이자 미국 최고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 '웰튼'의 국어(영어) 교사로 부임한 '존 키팅' 선생님은 첫 수업부터 학생들에게 문학 교과서 첫 장을 찢어버리게 하는 파격적인 교육 행보로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는 이 수업을 시작으로, 학생들에게 미래의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닌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가장 꽃다운 이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진리를 역설하고, 익숙하고 당연한 사실을 관점을 뒤집어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가르치며, 타인의 인정을 구하기보다는 자시의 신념과 독특함을 믿으라고 교육한다.

 

 새롭고 참신한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Dead Poets Society'라는 동아리를 결성한다. 하지만 대학에 가기 위해 동아리를 탈퇴한 학생들과 계속 동아리에 남아있던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대학 입시를 강조하는 학교의 외압에 못 이겨 동아리는 결국 해체되고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의 동아리 결성과 일탈에 영향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모교에서 해임된다. 영화는 '키팅' 선생님의 복직 같은 반전의 플롯 없이 그대로 막을 내린다. 그는 교육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고,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학교는 다시 예전처럼, 모든 학생이 문제집 앞에 고개를 숙이고 오로지 대학 입시를 위해 분투하는 철옹성이 될 터였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키팅' 선생님의 창조적인 관점의 수업과, '입시가 아닌 진정한 꿈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교육개혁을 위한 신실한 노력은 모두 쓸모없는 헛된 것이 되는 걸까? 영화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는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련의 교육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 밭과 척박한 황무지 같은 교육현장에 특별한 '씨앗'들을 심어 놓았다. 바로 새롭고 창조적인 교육혁신의 씨앗이었다. 자신은 떠나지만 언젠가 자신이 심은 교육의 씨앗이 풍성히 자라 학교 현장에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진정한 꿈과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자신의 교육철학이 반드시 학교에 '부활'하여 실현될 것이라는 근거 있는 '믿음'을 품은 채 학교를 떠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교육이 학교현장에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떠난다.

 

4.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키팅' 선생님의 이러한 희망과 믿음의 자세는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이 영화를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연관 지어 해석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정재찬 교수의 「시, 몽상과 묵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키팅' 선생님이 처음에 모교에 부임하여 수업을 새롭게 혁신하며 학생과 학교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듯, 예수 그리스도 또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수많은 기적을 행했고, 새롭고 혁신적인 가르침으로 당대의 고정관념을 신선하게 부수어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한꺼번에 받았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이 결국 학생과 학교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며 끝내 교육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듯, 예수 그리스도 또한 마지막에는 사람들에게 싸늘하게 배척받고 무시당했으며, 채찍에 맞고 고문을 당해 살이 찢기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온 몸의 피가 모두 쏟아져 나와 처참하게 죽었다.

 

 여기까지가 영화에서 다루는 '존 키팅'이라는 인물에 투영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티프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후 무덤에 묻혔다가 사흘 만에 죽음의 권능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했고, 이후 승천하여 하늘의 왕좌에 올려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떠났지만 그의 구원과 복음의 흔적들은 지구 곳곳에 씨앗처럼 뿌려져 풍성히 열매를 맺었고, 이 땅에 남은 그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의 가르침과 구원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영화 내에서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티프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즉 '키팅' 선생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교육적 유토피아를 실현하고, 학교가 바뀌고, 결국엔 한 국가의 교육 전체가 바뀌는 이상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그의 교육적 가르침 - '책상 위에 높이 올라서는 엉뚱한 행동을 통해, 주위의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는 가르침 - 을 받아들인 몇몇 제자들이 동일하게 책상 위로 일어서는 엔딩 장면을 제시하며, 그의 새롭고 참신한 교육혁신과 튼튼한 믿음의 교육철학이 지금의 교육 현실 위에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열린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사도들이 이 땅에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파했듯, 영화는 '키팅' 선생님의 제자들 또한 그의 교육적 뜻을 이어받아 교육현장에, 사회에 교육의 선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한다.
 

확실한 '교육적 믿음' 위에서 참다운 교육혁신은 싹틀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전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을 전하고 하늘로 승천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재림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시각에 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믿는다.'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키팅' 선생님이 설파한 교육적 가르침과 교육혁신 또한 아직 이 땅에 실현되지 않았다. 영화가 제작된 1989년 이후로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교육은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의 힘을 믿는다. 수업혁신을 비롯한 '좋은 교육'은 아직 우리 교육현장에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교육이 반드시 현실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세대가 아니라면 그다음 세대, 더 나아가 그다음의 다음 세대에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찬 '믿음'을 품는 것이다. 그 확실하고도 근거 있는 '교육적 믿음'의 토양 위에서, 우리 교육의 혁신과 참다운 교육은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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