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진 Jul 31. 2021

'영화'라는 우주에서 길을 잃었을 때

왕가위 컬렉션 3 -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의 감성적 평행우주론

 

1. 물리학자 왕가위의 감성적 평행우주론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왕가위 감독은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을 모아서 마치 두 개의 평행우주를 걷는 듯한 데자뷔를 창조해낸다. 두 영화는 에피소드부터 인물 설정까지 닮은 부분이 많은데, 이는 왕가위 감독이 두 작품을 본래 하나의 영화로 기획했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두 영화의 닮은꼴 연출을 계기로 영화감독을 넘어 스크린 속 평행우주를 만들어내는 '영화계의 물리학자'로 새롭게 데뷔한다.

 

 감성적인 물리학자에 의해 계획되어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제작된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는 '홍콩'이라는 공간과 '90년대'라는 시간, 그리고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서로 묘하게 연결된다.

 서양인 남자 친구를 만나러 재즈 바에 들르는 마약 밀매업자 임청하는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고 감미로운 재즈 'What a Difference a Day Made'를 청해 듣는다. 그녀가 떠난 그 주크박스 곁에서, 언젠가 킬러 여명과 그의 파트너 이가흔은 세련된 홍콩 음악 'Wang Ji Ta'를 함께 감상하며 서로의 향기에 취했을 것이다. 멜랑콜리한 색감으로 채워진 재즈 바에서 여명과 이가흔이 서로를 등지고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실 때, 그 옆의 다른 자리에서는 임청하와 223호 경찰 금성무가 서로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임청하가 재즈 바에서 나와 청킹맨션 복도 물품보관함의 다섯 번째 칸에서 권총을 꺼내고 유유히 빠져나가면, 몇 분 뒤 우연처럼 여명이 바로 그 칸에서 청부살인의 보상금을 꺼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임청하가 매일 걸치고 있던 레인 코트는, 폭포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밤 여명이 그의 연인 막문위에게 씌워주던 그 레인 코트일지도 모른다.


 킬러 여명의 청소부로 고용된 이가흔이 고가철도 옆에 들어선 그의 다락방을 청소하듯, 홍콩 뒷골목의 스낵바 아르바이트생 왕페이도 청킹맨션에 있는 663호 경찰 양조위의 집을 청소한다. 두 여성 주인공은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을 청소하면서 남몰래 사랑과 희열의 감정을 느낀다.

 이처럼 서로 다른 평행우주를 살아가는 두 여인의 세계는 공통적인 경험과 감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막문위와 왕페이도 발랄하고 톰보이 같은 성격으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왕가위 감독이 두 인물을 자매 관계로 설정한 건 아닐까?)

 

 경찰 금성무가 머무른 지하 맥도날드의 구석진 자리에는 킬러 여명이 앉아있고, 그의 연인 막문위가 그에게 발랄하게 말을 걸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추격하는 223호 경찰 금성무와 누군가에게 쫓기는 223호 죄수 금성무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라고 불리는 골목 어딘가에서 '스텝 프린팅'  촬영 기법으로 흔들리는 잔상을 남기며 불연속적으로 스쳤을 것만 같다. 동일한 이름과 동일한 얼굴을 가진 두 인물은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서로의 평행우주를 넘나들며 달리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죄수 금성무는 다섯 살 때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고 평생 말을 말을 못 하는 장애를 가지게 된다. 그가 먹었던 통조림은 경찰 금성무가 옛 연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서른 개를 모았다가 1994년 5월 1일에 한꺼번에 먹어버린,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과 똑같은 제품일 것이다. 스낵바에서 옛 애인을 기다리는 스튜어디스 스커트 차림의 양채니는 동일한 스튜어디스 유니폼을 입고 그 스낵바에 나타난 왕페이와 같은 비행기에서 근무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영화의 인물들과 관객의 상념 속,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라는 도로명을 지닌 홍콩의 거리들은 우리의 뇌 속 뉴런 세포들의 그물망처럼 서로 엇갈리며 입체적으로 교차한다. 그 길 어딘가에서는 두 영화를 동시에 연기한 배우들의 복잡한 감정들이, 두 작품을 함께 연출한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들이, 그리고 두 영화를 모두 보고 나온 관객의 심정들이 '스텝 프린팅' 기법의 불연속적인 잔상처럼, 0.01mm의 표면적으로 한 번쯤은 미분되어 스쳤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이 이별한 후에도 우연히 스치고 엮인다는 영화의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관객은「중경삼림」과 「타락천사」라는 두 영화의 인물과 이야기의 실타래 또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불연속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왕가위 감독은 이러한 감성적인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영화 연출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인연의 끈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인간관계의 상처와 슬픔, 그리고 이를 딛고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 관계를 맺은 사람과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관계'라는 것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는 '홍콩'이라는 공간과 '90년대'라는 시간, 그리고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서로 묘하게 연결된다.

 

2. 유통기한이 지난 기억을 처리하는 방법

 

 '식품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이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것도 있을까?' 223호 경찰 금성무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말처럼, 이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것은 없다. 황동규 시인이 그의 시 「즐거운 편지」에서 쓰듯 사랑과 그리움도, 기다림과 이별도, 심지어 증오까지도 모든 것은 언젠가 그치고 멈춘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통조림처럼 언젠가는 마음속에서 폐기되는 것이다.

 '나의 기억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만약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쯤으로 해두고 싶다.'라고 말하던 금성무의 진심을 헤아려본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떠나간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얼른 폐기하는 것이 마음에 이롭다. 차라리 그런 기억은 유통기한이 정말 짧았으면 좋겠다. 마치 마약 밀매업자 임청하의 총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녀의 바람난 애인이었던 어느 서양 남자, 그 남자가 죽기 직전에 먹은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1994년 5월 1일이듯이 말이다. 결국 그 남자의 뇌의 유통기한은 그날까지였던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통조림 속의 뇌는 모든 세포의 움직임이 정지하고 기억이 멈추어 폐기될 것이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그 반대였으면 좋겠다. 우리 뇌의 유통기한이 모두 지난 후에도, 사랑이라는 통조림은 폐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속 통조림에도 담겨있지만, 사랑이라는 관념 자체는 사람들의 인식 너머에 존재하기도 한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다가 헤어지면 두 사람의 마음속 사랑의 유통기한은 끝난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 그 자체는 과거의 어느 시간 어느 장소 속에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실재로 남아,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텝 프린팅' 촬영 기법처럼, 옛 연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를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것은 그 사람과 그 공간에서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도 같다. 헤어진 연인이 마치 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촬영된 스크린 어딘가에 희미한 잔상으로 남아있어, 그 공간을 지나치는 순간 그 사람과 스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헤어진 두 사람의 마음속 사랑의 유통기한은 다 끝나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 그 자체는 폐기되지 않고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 만 년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다 보면, 간혹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처리하기 곤란한 잔반처럼 남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기억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가끔씩 마음속에 불쑥 끼어들어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상한 통조림을 먹듯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그 기억을 먹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몸과 마음에 해롭기만 할까?

 「중경삼림」 속 223호 경찰 금성무는 헤어진 연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자 그동안 모았던, 유통기한이 1994년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 그날에 모조리 먹어 버린다. 「타락천사」 속 223호 죄수 금성무는 다섯 살 때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은 이후로 평생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두 작품에서 금성무가 먹은 통조림 속 기억과 사랑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되어야 할 기억이다. 「중경삼림」의 금성무에게는 헤어진 연인과 함께 사랑을 나누던 4년간의 애잔한 기억일 수도 있고, 「타락천사」의 금성무에게는 아이스크림 차에 치어 죽은 어머니에 대한 슬픈 기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유통기한이 지난 기억과 사랑의 통조림을 먹는 행위가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통조림을 먹은 사람들은 마음속 장애와 상처를 강점으로 바꾸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두 작품 속 금성무가 그렇다. 「중경삼림」의 금성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계기로 아픔을 딛고 더 성숙한 사랑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타락천사」의 금성무는 슬프고 안 좋은 기억들을 꾸역꾸역 먹어 말을 못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말이 아닌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긍정적이고 속 깊은 사람이 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기억의 통조림을 애써 버리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회피하고 잊으려는 행위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련을 당할 때 행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반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통조림을 억지로 먹어내는 것은 과거와 담담히 마주하려는 역설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은 일부러 잊으려고 회피하면 오히려 더 생각난다. 그런 기억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연스럽게 직면할 때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쉽게 잊을 수 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반대로 모두 끄집어내 보자. 꺼내 먹어보자. 과거와는 다른 시각으로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보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아물지도 모른다.

 

우리 뇌의 유통기한이 모두 지난 후에도, 사랑이라는 통조림은 폐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3. 「중경삼림」과 임청하의 레인 코트


 이름을 알 수 없는 멋진 여자가 있다. 홍콩 배우 임청하가 연기한, 언제나 선글라스를 쓰고 레인 코트를 걸치고 있는 마약 밀매업자 '그녀'이다. 비도 오지 않는데, 그녀는 왜 매일 레인 코트를 걸치고 있을까? 그녀는 말한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매일 레인 코트를 입는다. 우리는 당장 내일 비가 올지 안 올지 하는 사소한 일들조차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영원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당장 내일 비가 올지, 맑을지는 확률 상으로만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미래는 그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레인 코트를 입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그 자체를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녀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애써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사실 비가 올지 안 올지 하는 문제는 그녀의 주된 관심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날씨 같은 사소한 미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녀는 그저 레인 코트 하나에 자신의 보이지 않는 '깊고 긴 터널' 같은 미래를 전부 맡기고 베팅한다. 비가 올지 안 올지 모르기 때문에 레인 코트를 걸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그저 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쿨하게 살아간다.

 끝이 없는 터널은 없다. 모든 것을 터널의 길이 뻗은 대로 맡긴다는 것은, 언젠가는 터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확실히 전제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레인 코트를 입는 것은 '주어진 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언젠가는 터널의 끝을 희망하는 것'과 같은 터프하고 멋있는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레인 코트 하나에 자신의 보이지 않는 '깊고 긴 터널' 같은 미래를 전부 맡기고 베팅한다.

 

4. 「타락천사」와 이가흔의 지하 터널


 미래를 대하는 태도로서 비유된, 「중경삼림」에서의 '관념적 터널'은 「타락천사」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터널'로 다시 등장한다. 두 작품은 터널의 시작과 끝 지점에 서로 나란히 존재한 채로 묘하게 연결된다. 마치 두 개의 나란한 평행우주가 블랙홀과 웜홀로 신비롭게 이어지듯이 말이다.

 임청하는 레인 코트를 걸치며 '지금은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고 있지만 언젠간 반드시 밝은 터널의 입구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녀가 떠올린 터널의 이미지는 「타락천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홍콩 도심 속 지하 터널의 모습과 흡사할 것이다. 223호 죄수 금성무와 킬러의 파트너 이가흔이 깊은 밤 담배 연기를 휘날리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가며 향하던 그 지하 터널 말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킬러 여명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자 그를 함정에 빠뜨려 죽게 만든 파트너 이가흔과, 짝사랑하는 여인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결국 그녀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마는 금성무. 두 인물은 서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지만 그날 하나의 오토바이 위에 올라타 한마음이 되어 깊고 긴 터널 속을 상쾌하고 시원하게 달린다.

 옛 연인은 머릿속에서 킬러처럼 말끔히 제거하면 된다고, 새로운 인연은 터널 끝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그 사람이 누구든 터널 너머 처음 본 사람이 나의 연인이 될 거라고, 임의적인 인연의 세 겹 끈을 자유롭게 휘날리며 그들은 그렇게 모든 아픔과 슬픔과 실연을 잊고 터널을 달리는 것이다.

 

 90년대 당시 홍콩의 도심 터널은 실제로 매우 깊고 어둡고 길었다. 터널은 분명히 최종 목적지도 아니고, 가장 지향하고 싶은 이상향도 아니다. 그저 저 멀리 밝고 따뜻한 출구를 위한 길이자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둡고 축축한 터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터널 속에 우리의 아픈 기억과 옛 인연들을 미련 없이 끊어버리고 두고 올 수 있다. 또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오토바이 위에서 코끝을 핑 돌게 하는 상쾌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모든 상처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어둡던 터널은 오히려 상쾌하고 시원하게 상처를 치유하는 '슬리피 우드' 같은 힐링 던전이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감정의 정화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그곳, 「타락천사」의 지하 터널은 그런 곳이다.


미래를 대하는 태도로서 비유된, 「중경삼림」에서의 '관념적 터널'은 「타락천사」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터널'로 다시 등장한다.

 

5. 홍콩, 1994년, 불안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에서는 유독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상표가 '간접광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고 빈번하게 스크린 속에 노출된다.

 맥도날드. 거대한 맥도날드 간판 속에서 223호 경찰 금성무와 킬러 여명의 등은 한없이 작아진다. 그들은 무얼 바라 푸른 조명 속 빨간 간판이 걸린 지하 계단 속으로 침울하게 걸어 들어갔을까. 90년대 홍콩인인 그들은 어떠한 욕망을 품었기에 거대한 자본으로 쌓은 햄버거 가게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걸까.

 코카콜라. 663호 경찰 양조위는 스낵바에 들를 때면 언제나 코카콜라 기계에 몸을 기댄 채 휴식을 취한다. 그는 코카콜라 상표가 새겨진 종이컵을 집어 들고, 그 속에 담긴 뜨겁게 데운 코카콜라를 차를 마시듯이 홀짝인다. 왜 그는, 그리고 90년대 홍콩인들은 코카콜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걸까.


 홍콩은 백 년 동안 자유시장경제체제와 자본주의 이념 아래에서 자유롭고 세련된 생활을 누렸다. 1997년 사회주의 국가 중국으로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끝까지 잃고 싶지 않다는 홍콩인의 집착은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명멸하는 네온사인에 간절하고도 혼란스럽게 담긴다. 영화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혼재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90년대 홍콩인들의 주변인으로서의 불안을 과도기적인 정서로 담아내고 있다. 90년대 홍콩의 운명이란 마치 킬러 여명처럼 '모든 것이 누군가(영국과 중국)에 의해 이미 결정된 삶, 나(홍콩)는 그 결정에 피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삶'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홍콩의 이러한 과도기적인 불안 자체에 매력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완벽한 자유만이 존재하는 자유주의 체제는 정말로 좋기만 할까? 인류가 창조되던 처음의 때에 첫 사람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창조자로부터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허용받았을 때조차도, 창조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는 최소한의 제약을 두어 사람의 자유를 적당히 제한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인류는 그들의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치 있는 역사와 문화를 일궈낼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보아, 중국의 공산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체제가 유입될 즈음 자유가 점점 제한되던 불안한 분위기의 홍콩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최전선인 미국이라는 나라보다 매력적으로 여겨진다면 그 요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로 극과 극의 대척점에서 대립하는 이질적인 두 존재가 같은 공간에 공존하게 되면 상당히 낯설고 신선한 인상을 받게 된다. 홍콩이 그렇다. 중국에서 제일 자유로운 공간이자 자본이 가장 부드럽게 흐르는 도시,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체제가 물 흐르듯이 유입되고 있는 그곳이 바로 홍콩인 것이다. 전혀 다른 두 체제가 함께 존재하기에 홍콩은 가장 불안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곳임과 동시에 제일 매력적이고 다원화된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베이징과 상하이도 홍콩과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홍콩과 나머지 도시들은 근본적으로 '본래 유지되던 체제가 무엇이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홍콩은 백 년 동안 완전히 자유로운 자본주의 체제를 누리다가 훗날 공산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체제가 유입된 사례이지만, 나머지 도시들은 그 반대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도시 공간의 기초 토대를 이루고 있기에 홍콩은 나머지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다양하고 풍부하다. 여기에서 홍콩만의 매력이 나오는 것이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기가 인생의 '과도기'이며 그 연령대가 '주변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은 청춘을 닮았다. 동서양의 문화와 이미지가 묘하게 뒤섞인 과도기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혹은 그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갈 듯하지만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서 주변인이 되어 영원히 방황한다. 이렇듯 홍콩은 벼랑 끝에 아찔하게 피어 있는 한 송이 장미꽃 같은 도시이다. 청춘처럼 불안하고 위태롭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기가 인생의 '과도기'이며 그 연령대가 '주변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6. California Dreamin’, 포스트 왕가위즘을 향하여

 

 그렇게 홍콩이 과도기적인 불안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서 매력적이라면, 홍콩을 우리 마음속의 궁극적인 이상향으로 삼을 수 있는 걸까? 영화의 전반에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노래, 'California Dreamin’'의 가사를 곱씹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의 곡조는 스낵바 알바생 왕페이와 함께 춤을 추고 싶은 흥겨운 멜로디로 흘러나온다. 하지만 노랫말은 그렇지 않다.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즉 왕페이와 양조위는 모든 잎이 갈색이 되어 바스러지고 하늘은 잿빛인 암울한 상황을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홍콩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면 지금 있는 홍콩보다 더 따뜻하고 안전한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싶다는 심정을 표현하는 셈이 된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지만 왕페이도 양조위도 결국 홍콩을, 그리고 자신의 장소를(왕페이에게는 스낵바, 양조위에게는 청킹맨션의 집) 떠나서 진정한 이상향으로 향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If I didn’t tell her, I could leave today'. 만약 1년 전, 양조위가 왕페이에게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의 재즈 바로 오라고 편지하지 않았다면, 양조위는 그날 바로 미국에 있는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날 수도 있었다. 왕페이는 그 편지를 읽었지만, 둘은 서로 다른 캘리포니아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잠시 엇갈린다. 양조위는 홍콩에서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스낵바를 인수하며 창업하고, 왕페이는 미국의 도시 캘리포니아에서 스튜어디스로 취업하며 서로 새롭고 다른 삶을 시작한다.

 그래도 그들의 진정한 이상향은 여전히 '캘리포니아'였나 보다. 일 년 동안 홍콩에 홀로 남아있으면서 새로운 스낵바를 창업할 때에도 양조위는 왕페이가 종이로 낙서하듯 그려 준, 비에 젖은 캘리포니아행 티켓을 소중하게 간직했고, 왕페이도 그런 양조위를 다시 캘리포니아로 데려가기 위해서 일 년 후 홍콩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양조위와 다시 조우한 왕페이는 그에게 비행기 티켓을 새로 그려주며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 양조위는 답한다. '당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윽고 카메라는 스낵바의 스피커를 비춘다. 스피커에서는 어김없이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만의 진정한 낭만적 유토피아, 캘리포니아로 함께 떠날 것을 넌지시 내비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설레고 낭만적인 California Dreamin’, 캘리포니아여, 오라.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현실에서 벗어나 더 낭만적인 곳으로,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말이다. 지금 당장 떠날 수는 없겠지만 영화와 글을 통해서라면, 상상과 꿈을 통해서라면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떠나갈 수 있다.

 환한 대낮에  「중경삼림」 같은 백일몽을 꾸자. 우리는 우리만의 유토피아, 따뜻하고 청량한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떠날 것이다. 양조위와 왕페이 같은 우리 한 쌍. 우리는 서로에게 양조위가 되고 왕페이가 되어, 그렇게 아름다운 연인이 되어 동일한 곳을 함께 바라보자. 왕페이가 그려준 좌석 번호 663의 티켓을 손에 쥐고, 우리는 열다섯 시간이라는 하늘 위의 시간 속에서 '몽중인'이 되어 폭신한 좌석에 온몸을 맡긴다. 비행기 속에서 꾸는 꿈은 대낮처럼 행복한 빛 같을 것이다.

 비행기는 캄캄한 밤을 가로질러 날아갈 것이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타락천사」 같이 어둡고 촉촉한 지하 터널 같겠지. 하지만 그것 또한 좋다. 열다섯 시간의 비행 여정을 통해 우리는 만 오천 피트 상공 위에서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밤이 멀어지고 검푸른 새벽이 오면,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고 깊은 숲을 가로지를 것이다. 말 그대로 '중경삼림' 같은 세상의 모든 복잡한 도시의 삼림과 깊은 자연의 숲 속을 지나며 우리 마음은 더 푸르러지고 깨끗해지겠지.

 새벽 위에 하얀 꿈같은 영원한 동이 터 오르면, 우리는 우리만의 영원한 안식처인 캘리포니아로 가자. 그곳은 양조위와 왕페이 같은 우리 인연의 세 겹 줄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진정한 이상향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따뜻하고 청량한 사랑이 해처럼 영원히 동터 오르겠지. 행복은 높은 셋째 하늘 같이 영광의 광체가 되어 영존할 것이다. 설레고 낭만적인 California Dreamin’, 캘리포니아여, 오라.

 

매거진의 이전글 그날, 장국영의 진심은 이러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