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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Jul 17. 2021

그날, 장국영의 진심은 이러했다

왕가위 컬렉션 2 - 「해피투게더」, 이것은 장국영의 회고록이다

 

1. 지구 반대편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한 편이 끝난 것이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렸고, 도자기 드리퍼와 유리잔 사이의 거리를 계산했다. 두 물체 사이의 공간은 중력의 근원을 사이에 두고 지구 정반대편의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홍콩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도 같았다. 드리퍼와 유리잔은 나의 홍콩과 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처럼 고운 커피 입자를 사이에 두고 불완전한 상하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여과지를 고이 접어 드리퍼 속에 포개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엽궐련 냄새가 나는 검은 가루들을 그 속에 담았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폭포수처럼 흘려보냈다. 물줄기는 포트 입의 절벽을 타고 검은 입자들을 향해 이과수 폭포 같이 쏟아졌다. 하지만 유리잔에 낙하할 무렵이 되자 물은 답답한 초침 소리처럼 막혀 똑 똑 떨어질 뿐이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짧은 시간은 꼭 우리의 관계와 닮아있었다. 너와 나의 마음은 언제나 폭포처럼 쏟아내도 커피 방울처럼 막혀서 우러나오곤 했던 것이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짧은 시간은 꼭 우리의 관계와 닮아있었다.

 

2. 탱고, 하나의 심장과 네 개의 다리로 추는 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번화가에 솟은 거대한 오벨리스크 주위로 밤의 네온 전광판들이 화려하게 명멸했다. 영사기에 익스트림 롱숏으로 담기는 이 도시의 중심축인 7월 9일 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고 했다. 하지만 폭포처럼 시원하게 뻗은 거리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했고, 꽉 막힌 택시에 앉아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료한 택시 안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듯 리듬을 탔다. 마음속으로 춤을 출 때면 우리는 꽉 막힌 도로에서도 그날 밤 탱고 바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춤을 추던 곳은 벌거벗겨지고 더럽혀진 골목 귀퉁이의 어느 작은 춤집이었다. 창문 밖으로 아코디언의 숨소리와 바이올린의 신음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던 곳, 그곳에서의 애잔한 음악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심장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탱고'라는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그러고는 서로 함께했던 시간들을 사냥했다.

 춤을 출 때 우리의 몸에서는 뜨거운 물 분자들이 흘러나왔고, 그들은 어김없이 바닥으로 튀어 낙하하곤 했다. 너의 땀과 나의 눈물은 그렇게 하나의 방울이 되어 무대 위에 퍼졌다. 이렇게 우리는 끝내 한 번도 함께 가 보지 못한 이과수 폭포의 물안개 같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엎질러진 물방울을 즈려밟으며 멈추지 않는 춤을 추었다.

 

우리는 엎질러진 물방울을 즈려밟으며 멈추지 않는 춤을 추었다.

 

3. 커피와 담배

 

 콧볼에 닿으면 그윽한 향기지만 혀끝에 닿으면 씁쓸한 커피 한 잔 같은 너. 눈가에 닿으면 아름다운 불빛이지만 입술에 닿으면 더러운 담배 한 대 같은 나. 우리는 왜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고 싶을까. 너를 안 볼 수가 없는데 그런데 볼 수도 없었다.

 공중전화 상자 안에서 나는 성냥이 없어 너의 타는 담뱃대 끝에 내 담배를 살며시 포개어 불을 붙였다. 담배 끝은 입으로 들이마실 때 불이 환하게 살아났다가, 밤하늘 속으로 숨을 내뿜으면 헛된 연기가 되어 여행지의 습기 속으로 영원히 소멸한다. 너의 숨으로 불을 지핀 나의 담배에는 네 호흡이 남아있는데, 너는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공중전화 상자를 떠나버렸다.

 너의 냄새와 숨이 담긴 혼은 그 담배 한 대가 마지막이었다. 담배 한 대만큼의 네 숨결을 한 입씩 삼킬수록 너와 나의 시간도 한 모금씩 한 모금씩 태워지고 있었다.

 

나는 너의 타는 담뱃대 끝에 내 담배를 살며시 포개어 불을 붙였다.

 

4. 중력을 거스르는 총알이 있다면

 

 이제는 네가 떠나 깨끗하게 정리된 빈 방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커튼을 타고 식탁보를 어루만지며 탱고처럼 허무하게 흘러나온다. 식탁 위에는 언제나 식은 커피 한 잔과 타다 만 담배 한 대가 버려져 있다.

 서로의 은밀한 곳들이 수없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담배 연기 같은 하얀 젊음이 헛되이 쏟아졌을 우리의 방은 꼭 스스로 한쪽 귀를 잘랐다던 어느 화가가 자살하기 전에 잠깐 살았던 여관방 같았다. 그의 방에서 붓과 물감은 한몸이 되었고, 그것들은 탱고 바 같은 캔버스 위에서 멈추지 않는 춤을 추곤 했다. 탄환이 재어진 권총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다는 붓칠을 멈추지 않았던 화가처럼, 우리 사이가 멀어져 지구 반대편의 대척점으로 남게 된 것도 결국 그토록 격렬하게 헤어지기 싫다고 말하는, 진달래꽃 같은 붓칠의 표현이라고 믿고 싶었다.

 맨땅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중력의 근원을 뚫고 지구 정반대편의 대척점으로 솟아오를까. 그 대척점이 이과수 폭포라면 총알은 물보라가 되어 얼마나 아름답게 쏘아 올려질까. 석류 같은 관자놀이에 대고 시험 삼아 방아쇠를 당겨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두개골도 통과하지 못하는 총알이 지구의 대척점을 향해 솟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참 우스웠다.

 

총알은 물보라가 되어 이과수 폭포에 얼마나 아름답게 쏘아올려질까.

 

 5. 세상의 끝에서 슬픔을 외치다

 

 언젠가 너와 이과수 폭포를 들이마시러 오래된 차를 타고 무작정 함께 떠난 적이 있다. 이정표 하나 없는 흑백의 도로와 하늘 속에서 차가 고장 났고, 그날로 우리 사이도 고장 나버렸다.

 나는 흑백의 피사체가 되어 필름에 담기었다. 필름의 검은 부분은 너로 채워졌고 너의 호흡은 흑백의 배경이 되어 스크린에 비추어졌다. 알지 못하는 신대륙의 바람을 맞으며 너와 함께 가보기로 약속했던 폭포, 그곳으로 혼자가 되어 멀리 떠난다는 건 슬프지만 후련한 한 편의 로드무비 같았다.

 일차선의 도로 한 줄만이 끝도 없이 뻗은 영원한 황무지에서 오래된 차를 타고 흑백의 화면 속을 항해할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너의 홍콩은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다. 너의 대척점은 나의 대척점과도 같아서, 나를 태우고 달리는 흑백 화면 속의 차와 도로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뒤집혀 보일 것이다.

 

혼자가 되어 떠난다는 건 슬프지만 후련한 한편의 로드무비 같았다.

 

 외로운 조종사가 홀로 탑승하고 있는 오래된 자동차는 이과수 폭포의 속 중심을 천천히 가르고 지난다. 이윽고 조종사는 지구 최남단의 항구도시 우수아이아에 착륙한다. 그 조그마한 뱃마을이 세상의 끝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증명되었는데, 왜 우리의 입술 어딘가에는 아직도 땅끝 - The End of the Earth - 이라는 말이 남아있을까. 지구는 둥글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는 왜 육지와 바다가 접한 어느 지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땅끝이라는 이름을 지어줄까. 땅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땅의 끝이 아닐까. 아니 땅의 시작이 아닐까.

 

땅의 대척점 위에 거울처럼 서 있는 네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리라.

 

 앞으로  나아갈 곳이라고는 남극밖에 없는, 청량한 바다와 파타고니아 산맥의 만년설로 둘러싸인 세상의 종점을 지키는 등대. 뭇사람들은 세상 끝이라고 불리는 등대에 슬픔을 묻어두고 온다는데, 나의 녹음기에는 어떤 슬픔을 담아  것인가.

 세상의 마지막을 비추는 등대에 올라간다면 그날 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속에서 입을 맞추던 그 담배 한 모금을 태우고 싶다. 담배 한 모금에 슬픔 한 줌, 또 한 모금에 지나간 시간을 한 줌 담아서 세상의 끝으로 날려 보내고 싶다.

 연기는 남쪽 나라로 우편을 배달하는 붉은 나무 비행기가 되어 지구를 한 바퀴 순환하겠지. 이윽고 비행기는 극지방을 날아 파타고니아를 어루만질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상공의 열기에 잠깐 뜨거워졌다가 이과수 폭포 속을 유영하며 깨끗하고 순수해진 연기는 순결하고 흠 없는 산소가 되어, 땅의 대척점 위에 거울처럼 서 있는 너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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