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진 Jul 03. 2021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왕가위 컬렉션 1 - 「화양연화」, 추억은 소유할 수 없기에 아름답다

 

 한없이 어둡고 까만 우리들의 시간 속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면
 초침 소리들이   없이 인수분해되며 떨어진다

 「阿飛正傳」처럼 「花樣年華」처럼
 시간은 향기로운 커피가 되어 유리잔 속에 떨어져
 분쇄된 원두 속으로   다시 되흘러오지 않는다

 드리퍼에 그윽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내려지는 과거들은
 한순간처럼 감미로운 붉은 와인  잔의 향내를 풍기지만
 혀끝에 갖다 대면 그저 쓸개처럼 떫을 뿐이다

 우리의 젊음은 육십 년대 홍콩 뒷골목처럼 불량한 원두
 순간의 향내만 그럴듯한  모두 갈려 쓸개즙이 되어 버린
 슬프고 아름다운 花樣年華
 
 - 핸드드립 영화  

 

시간은 향기로운 커피가 되어 유리잔 속에 떨어져, 분쇄된 원두 속으로 두 번 다시 되흘러오지 않는다.

 

 1. '시간 예술'의 절정, 시네마
 

 한때 젊은 사자처럼 아름다움을 뽐내던 두 섬나라, 영국과 홍콩. 두 국가는 화려했지만 이제는 저물어 옛 순간들을 '화양연화'처럼 떠나보내는 저녁노을 같은 나라들이다. 그런 두 나라를 대표하는 특별한 두 감독이 있다. 왕가위와 크리스토퍼 놀란이다. 섬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많이 다르다. 특히 영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연출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놀란은 불가능한 판타지로 시간을 거스르고 되돌린다. 시간을 이겨낸다. 그의 영화 속 시간은 인물들의 꿈을 실현시키기도 하고 좌절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시간과 사투하며 결국 놀란의 영화 속 주인공은 시간을 극복하고 성장한다.

 한편 왕가위의 시간은 한없이 체념적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시간을 일부러 이겨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들의 몸속으로 고요히 체화시킨다. 왕가위는 시간에 순응하고 끊임없이 초침의 시계 바퀴를 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슬픈 시간을 현실적인 연출을 통해 담담하게 읊조리는 것이다.

 

 왕가위는 시간을 시각과 청각으로 감각화하여 연출하는 데에 뛰어난 감독이다. 그는 '시계'라는 소품의 이미지와 초침 소리를 통해 시간의 시청각화를 동시에 실현한다.

 먼저 시간의 시각화는 영화의 미장센에 시계 소품을 지속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불륜 관계의 남녀로 그려지는 두 주인공 '차우'와 '수리첸'의 사무실 씬 앵글에는 언제나 시계가 함께 담겨 촬영된다. 아예 시계만 크게 연출한 시퀀스도 있다. 그들의 관계에 있어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어 시간의 청각화는 영화의 사운드 시스템에 초침 소리를 교묘히 녹여내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신문사에서 '차우'가 두드리는 타자기 소리와 그의 자리 위에서 째깍거리던 시계의 초침 소리, 그리고 창문 너머 들려오는 홍콩 시내의 빗소리가 소리가 섞여 흐르던 '시간의 소리'를 떠올려본다.

 시간에 소리가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시계가 걸린 곳에서만 희미하게 초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가 실제로 24시간 내내 우리 귀에 들려온다면? 무슨 일을 하든 초조할 테고,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에 불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아비정전」에서 내내 흐르던 초침 소리처럼, 이 작품에서도 건조하게 침잠하는 초침 소리는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차가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시간의 소리'는 윤리적이고 로맨틱한 딜레마에 발이 엉킨 두 주인공 사이의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동시에, 관람자에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또한 이렇게 빠르게 지나갔겠구나' 하는 씁쓸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없이 무미건조하며, 극도로 적막한 긴장의 시간이다. 작품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들의 만남은 먼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는 곧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만큼 한정적이고 유한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라져 가는 모든 유한한 것들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 한 순간을 품은 초침 소리들이 시계 위를 한 바퀴 운동하며 움직여낸 자취(locus). 초침이 가리킨 그 분절의 순간만큼은 화양연화처럼 아름다울지 몰라도, '순간'이 모여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도형은 슬프고 아련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시간이 순간으로 나뉘어 그렇게 시간의 한 지점에 영원히 멈춰 있는다면, 멈춰있는 그 순간은 더 이상 시간이 아니라 장소성을 띄는 '공간'이 될 것이다. 영화에서도 둘만 있던 공간들 - '차우'와 '수리첸'의 집, 데이트를 하던 레스토랑, 밤을 가르던 택시 안, 둘만의 호텔 방은 더 이상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를 것만 같았던 하나의 '영화적 공간'이었다.

 

 결국 '차우'와 '수리첸'은 (그리고 왕가위는) 끊임없이 흐르는, 그래서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조차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을 초침 소리로 '인수분해' 하여 영원한 '공간'으로 남겨두고, 이를 통해 그토록 아름다웠던 순간을 그들만의 장소에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영화를 감상하다가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면, 그 순간의 미장센이 꽉 찬 화면 안의 하나의 공간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영속적으로 이미지화되는 것과 같다. 일시 정지한 순간의 화면을 저장하여 언제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극장에서 감상하는 영화'는 절대로 일시 정지시킬 수가 없다. 영화는 멈춰있는 공간으로 구성되는 공간 예술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표현되는 시간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마음속으로 영원히 저장해 내기란 우리에겐 화양연화와도 같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렇게 잡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을(아니 어쩌면 '순간'과 그 순간에서의 '공간'을), 왕가위 감독은 '화양연화'라는 네 글자로 스크린 속에 그리도 아름답고 슬프게 담은 것이리라.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없이 무미건조하며, 극도로 적막한 긴장의 시간이다.

 

 2.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영화 속 '차우'를 연기했던 양조위의 담배 연기(smoke와 acting 두 가지의 뜻을 동시에 지닌다)는 정말 훌륭하다. 관람자로 하여금 폐부에서부터 타는 목마름을 느끼게 하는 연기다.

 레스토랑에서, 신문사에서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그중에서도 늦은 밤 불이 꺼진 신문사에서 홀로 작은 스탠드를 켜고 무협 소설을 창작하며 내뿜던 그의 담배 연기는 퍽 인상 깊다. 오로지 자욱한 담배 연기만을 스크린에 연출하는 미장센. 담배 연기는 명멸하는 스탠드를 천천히 넘어 알록달록 불이 켜진 어두운 시계를 적시고, 죽어 있는 시간 속으로 깊게 배어 든다.

  

 담배 연기에 적셔진 시계도 마음에 든다. 숫자 대신 홍콩식의 번쩍번쩍 유치한 전등으로 알 수 있는 시간. 째깍째깍 초침 소리는 명멸하는 전구를 때리며 흐른다. 시계가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머금고 시간이 담배 냄새에 폐인처럼 절여진다는 것, 그건 무협소설을 써서 성공하겠다는 '차우'의 헛된 꿈처럼 그의 시간의 덧없는 증발을 암시하는 연출일 것이다.

 담배 연기는 한 번 들이마시면 폐부에 깊은 부패만을 일으킨 채 다시 내뿜어진다. 내뿜은 연기는 입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공기 중으로 영원히 소멸되어 버린다. '차우'와 '수리첸'의 시간도 그렇다. 그들의 시간은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는 순간처럼 가장 황홀하고도 쓰라린 '화양연화'가 되어 영원히 과거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그들의 시간은 담배 연기 같은 '화양연화'가 되어 영원히 과거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3. 영화는 근본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예술이다

 

 '차우'와 '수리첸'의 첫 번째 데이트는 슬프도록 아이러니하다. 로맨틱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외도를 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데이트였던 것이다. 결국 '차우'와 '수리첸'은 서로가 몸에 지닌 넥타이와 가방을 통해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불륜을 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차우'가 맨 넥타이는 '수리첸'이 자신의 남편에게 선물한 넥타이였고 '수리첸'이 멘 가방은 '차우'가 자신의 아내에게 선물한 가방이었다. 각자의 배우자에게 준 선물이 외도를 통해 돌고 돌아 상대방의 소유가 되어 버린 것이다.

 

 '차우'는 작품이 전개되는 내내 매우 빈번하게 그 넥타이를 착용한다. '수리첸' 또한 싱가포르로 떠나려는 '차우'를 잡기 전까지 그 가방을 멘다. 그의 넥타이와 그녀의 가방은 불륜을 저지른 자신의 배우자의 행위를 용납하면서 자신의 외도 또한 묵인함과 동시에, 다시 자신의 배우자에게로 돌아갈 것임을 암시하기도 하는 묘한 소품인 것이다.

 '수리첸'이 싱가포르로 떠나려는 '차우'를 잡기 위해 그의 호텔방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그녀는 남편이 선물한 가방과는 다른 가방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를 눈감으며 다시 남편에게로 갈 것이라는 마음과, 이전 것들은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차우'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극작가 이강백의 희곡 「결혼」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보잘것없고 가난한 그는 관객들로부터 넥타이나 가방 따위의 소품을 빌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기가 빌린 물건을 비롯하여, 결혼으로 차지한 아내까지도 본래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인정한다. 인생에서 내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은 사실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덧없는 진리를, 그는 비로소 인생이라는 연극이 막을 내릴 무렵에야 깨달은 것이다.

 '차우'와 '수리첸'의 시간도 그렇다. 그들의 만남과 추억은 한 편의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텅 빈 무대처럼 허무했다. 그들의 시간은 단 일초라도 그들의 소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상대방은 소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서로를 소유하지 못한 채 그저 초침 소리가 시계의 자취(locus)를 그리는 짧은 시간만큼만 잠시 서로를 '빌렸던' 그들. 그리고 그 사실을 비소로 자기들을 비추던 카메라가 꺼질 무렵에야, 빨간색 엔딩 크레딧이 명멸할 무렵에야 깨달았던 그들. 그랬기에 그들은 다시 서로의 배우자가 선물한 넥타이와 가방을 지니고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것이리라.

 

그들에게 있어 상대방은 소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많은 생각이 교차할 무렵, 빨간 엔딩 크레딧이 관람자의 각막을 강렬하게 깎아내린다. 어느덧 영화가 끝난 것이다. '차우'도 '수리첸'도 결국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했고, 상대방과 함께 했던 '화양연화' 같은 추억들도 소유하지 못했다.

 주인공들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는 것처럼, 관람자가 감상하는 이 영화 또한 그렇다. 제목부터 「화양연화」이니 말이다. 극장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보았지만, 그 누구도 영화를 손에 '소유한 채'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

 영화는 추상 예술이다. 그래서 그림이나 조각처럼 소유할 수 없다. 또 영화는 시간 예술이다. 시간의 흐름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움직이며 표현될 수 있지만, 그 동일한 시간의 지배를 받기에 세월이 지날수록 관람자들의 머릿속에서 영화는 점점 지워지고 망각된다. 결국 영화는 언젠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질 유한한 예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이 영화의 제목을 떠올린다.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반드시 지나가고 사라진다. 하지만 애초에 인생의 지나간 순간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 시간이 유한하고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언젠간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라져 가는 모든 유한한 것들은 아름답다. 일시 정지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의미를 두고 감상하게 되는 영화의 장면들. 사라지기 때문에 소중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추억들. 시간과 사람과 사랑 같은 것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은 주로 사라지거나 썩지 않을 딱딱한 물건들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 견고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처럼 유약한 기억들과, 보이지 않는 마음들, 그리고 사라져 가는 아름다움들로부터 나온다. 그런 소중한 가치들을 붙잡으며 우리는 오늘 또 어떤, 영화 같은 덧없고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될지 궁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어나서 처음 본 영화, 기억나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