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이'라는 물리적 잣대에 의해서가 아닌, 주체로서의 나이 듦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왼쪽 상단 위에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월, 화요일 밤마다 EBS에서 하는 다큐프라임 시리즈 중 하나인 듯했다. 그리고 글자 아래 ‘1부. 완벽한 하루’가 부제로 달려 있었다.
3부작 중 1부는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호스피스 병원 이야기를 다룬 화였다. 죽음을 준비하는 그들에게 완벽한 하루는 과연 무엇일까? 아프지 않고 하루를 잘 보내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하지만 누구에게나 '완벽한 하루'는 비슷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무탈히 하루를 잘 보내는 것. 이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도, 아직 살날이 조금 더 있는 사람도 비슷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완벽한 하루에 대해서는 잠깐 고민을 해봐도, 우리의 마지막 집에 대해서 고민하기를 주저한다. 인생의 처음은 우리 의지대로 시작할 수 없어도, 적어도 마지막은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데 말이다. 현생에서의 집 장만도 어려운 현실에, 마지막 집을 생각해 보는 건 언감생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집, 공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끝이 있기에 열심히 사는 것이기도 하고, 언젠가 멈춰야 할 때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니고자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에게 마지막이 닥쳐온다면, 나는 지나온 나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부, 완벽한 하루'에 등장하는 호스피스 병원의 환자들 또한 그렇다. 머리로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의 끈을 놓기가 어렵다.
“너는 왜 내가 희망을 갖지 않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느냐.”
호스피스 병원의 한 환자 분이 보호자에게 했던 말이다.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인생을 가꿔온 그였지만, 죽음을 앞두고의 마음이란 건 한없이 약해질 뿐이다. 그래서 의료진, 자원봉사자, 성직자, 사회 복지사 분들은 그들이 죽음을 객관적으로 잘 받아들이고, 마지막까지 마음을 편안히 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나이 듦”이란 어쩌면, 희망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꿈과 희망이 가득하다. 정점으로 향하는 나의 인생은 아직 과정 중에 있고, 종국에 결실을 맺을 미래를 상상하며 힘차게 나아간다. 어쩌면 무지해서 용감한 것일 수 있지만,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도 많아지고, 또 이제는 알아가는 재미보다는 알기 때문에 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삶이 왠지 모르게 지루하게 느껴지고 팍팍해진다.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해 입원한 호스피스 병원 사람들이 자꾸만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유도 같지 않을까.
물론 희망은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쥐어준다. 그러나 늘 희망에 가득 찰 수는 없다. 희망이 주는 기대와 설렘이 줄었지만, 대신 두려움도 상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두려움이 조금 상쇄된다. 왜냐하면 한번 해봤기 때문이다. 불안했던 커리어가 안정된 커리어로 변환된다. 젊었을 적에는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까? 저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나이가 들면 예상된 결과 값을 충분히 도출할 수 있다. 이는 수없는 반복과 실패를 통해 얻어낸 결과이며, 굉장히 대단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연륜이란 설령 희망은 좀 사라지더라도, 불안한 인생을 조금 더 완숙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사실 나도 “나이 듦”에 관해서 이렇게 저렇게 고민해 보았지만 아직 실감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 않는 건, 누구에게나 완벽한 하루는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든다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쪽은 사회인 것 같다. 인간의 마지막을 소진, 무쓸모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사회 쪽이다. 오죽하면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집보다는 병원, 요양원과 같은 ‘시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니까 말이다.
우리는 나이 든 인간과 함께 주체적으로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다큐멘터리 2부에서 등장한, 고령자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돌봄에 중점을 둔 주간보호시설 '이시이의 집'을 설립한 이시이씨는, ‘돌봄’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다림”. 무엇이든 제대로 된 결실 혹은 좋은 결말을 내려면 기다려야 한다. 김치도 푹 익어야 맛이 있듯이 “기다림”은 비효율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된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더더욱 기다릴 줄을 모르는 것 같다. 교육도, 복지도 모든 게 시간을 들여야 하는 문제인데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우리는 성과만 내기에 급급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고 죽음을 대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현시대를 잘 진단해야 한다. 처음과 끝이 든든해야 과정도 든든한 법이다. 사회는 언제든 도전할 수 있는 든든한 안전망과 언제 어디서도 편안히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안정감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가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라도 변화를 꾀해보아야 한다. 물리적 나이에 의해 미숙과 성숙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잣대에 의해 미숙과 성숙을 오가보자. 기대와 설렘이 덜하더라도 안정감을 느끼며, 또는 불안하더라도 무지에서 오는 용기와 희망을 느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