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맥주여행- 스리랑카
지난 여름, 30리터의 무거운 백팩을 짊어지고 스리랑카로 출발했다.
인도보다는 조금 만만해 보였고, 동남아보다는 익사이팅해 보였던 스리랑카.
나의여행은 기차를 타고 눈물 모양의 섬을 빙둘러 콜롬보에서 갈레, 미리사 해변, 하푸탈레, 캔디. 그리고 다시 콜롬보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500년 가까이 받았지만, 이방인들에게 어찌 그리 해맑을 수 있을까. 사람이그립고 정이 그리운 배낭여행자에게 그들은 마음을 열고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우리에겐 흔하디 흔한 사진 한 장이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는 평생 사진 한 장을 가지는게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들고있는 외국인을 보면 아기 엄마들은 “우리아기 사진 좀 찍어줘요.” 하고 아기를 들이민다. 화면에 찍힌 모습을 보여주면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보내는데, 어찌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조금 영악한꼬맹이들은 나를 찍으려거든 “스쿨펜(볼펜)”을 내놓으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지만, 그 정도는 귀여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기-승-전-카레로 이어지는 스리랑카 음식에 진저리 치다가도 기차 옆 좌석에앉은 가족이 내주는 밀크티 한 잔에 감동받고, 내 얼굴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을 보면서 여기라면 기약없이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의외로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술이었다.
술 파는 곳을 안다면 데려가 줄래? 와인 스토어
스리랑카 콜롬보에 도착했을 때도, 갈레에 도착했을 때도 맥주를 비롯한 술을 파는 식당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스리랑카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라이언맥주’를 마시려고 했는데, 라이언 맥주는 둘째치고술 자체를 구경할 수 없었다.
파란 바다가 시원한 맥주처럼 보이는 환각에 시달릴즈음 릭샤꾼(스리랑카의 인력거꾼)에게 부탁을 했다. “ 너 술을 어디서 파는지 알아? 그곳으로 나 좀 데려다줄 수 있어?” “ 물론이지!”
흔쾌히 대답한 릭샤꾼은 10분 거리에 있는 갈레 버스터미널 근처의 와인 스토어로 날 안내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가 보다. 우리나라의 터미널과 기차역에 기사식당이 많듯이 스리랑카도 터미널 근처엔 허름한 로컬 식당이 많았다. 터미널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와인 스토어’에서 내가 맥주쇼핑을 즐기는 동안 릭샤꾼 아저씨는 기다려줬고, 술병을 달그락거리며 환한 미소를짓고 있는 날 숙소까지 다시 데려다줬다.
동남아 여행의 묘미라면 몇 백원 안 하는 저렴한 술값인데, 스리랑카는 밥값보다 술값이 더 비쌌다. 그래도 이 더운 나라에서 맥주마저 안 마신다는건 상상조차 할 수없어 와인 스토어를 단골 삼아 들락날락했다.
갈레에서는 술 구하기가 힘들었지만, 미리사 해변은 휴양지라 해변 앞 모든 레스토랑에서 술을 팔았다.
하푸탈레와 캔디로 넘어갔을때는 그 지역의 와인 스토어 위치를 제일 먼저 알아두었다.
여행 막바지가 돼서야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숙소 주인이 내 방문 앞에 쌓여있는 수많은 맥주병을 보며 자기가 치워도 되냐고 물어봤던 이유를..
스리랑카에서 병맥주가 비쌌던 이유는 보증금 때문이었고, 와인 스토어에 술을 구입한 영수증과 빈병을 반납하면돈으로 돌려준단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전날 먹은 빈 맥주병을 가져다 주고, 다시 그 돈으로 술을 사는 병팔이(?)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병에 3천 원, 4천 원 하는 맥주 가격을 조금이라도아끼는 방법이라면 방법이랄까? 스리랑카에선 맥주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외국인 전용의 술이었고, 현지인들은저렴하면서 빨리 취할 수 있는 럼이나 현지 위스키(술이름은 ‘아락’이다)를 마셨다.
햇빛이 들지않던 어두컴컴한 스리랑카의 바
1993년 실베스터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나왔던 영화 <데몰리션맨>에서는 지상과 지하세계가 엄격하게 나눠져 있었다. 범죄라곤전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은 이상적인 지상세계와 말썽 부리는 인간들을가둬둔 어두컴컴한 지하세계.
오래 전에 봤지만, 아직까지 강렬한 잔상이 남아있는 영화다.
스리랑카의바에 들어간 순간, 난 <데몰리션맨>에 나오는 지하세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대부분의 스리랑카 인과 격리시킨듯 햇빛조차 들지 않는 음침한 공간엔 술 마시는 사람들(애주가라고부르자)만이 모여있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모였다는 묘한 동료애, 이 구역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도 지하세계의 일원이 된 거 같았다.
철창이 내려가 있는 바에서 라이언 스트롱 맥주(페일 라거 ABV8.8%)를 사고 칙칙한 시멘트 벽 옆에 있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스리랑카여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바에 여자가 온다는 건 꽤 낯선 일이다. 젊은 외국인 여자가스리랑카 라이언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신기하다 싶었는지 어떤 아저씨들은 말을 걸었고, 숫기 없는 젊은 남자들은 나를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스리랑카는 주류판매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10시에서 14시까지. 17시까지 21시까지만 영업을 한다. 브레이크 타임엔 셔터를 내리고 장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중간에 쫓겨나기도.
내 옆에서 녹슨 오프너로 칼스버그 맥주를 따주셨던 바텐더 아저씨께 오프너를 선물로 드렸다. 내일도 오겠다고 인사드렸는데, 버스 시간 때문에 작별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게 영 아쉽다.
조이스 펍의 바텐더 아저씨는 아직도 내가 드린 오프너를 사용하고 계실까? 한국인 여자에게 오프너 선물을 받았다고 행복해하시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이 글은 Dnc 주류잡지에 기고했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