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면서 잃게 된 것 중 가장 피부로 와닿은 것은 급여였다. 매월 꼬박꼬박 나오던 수입이 사라졌다. 평소 물과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퇴직 후에야 깨닫게 되다니, 알고 보니 급여는 매월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느 날 아내의 한숨 섞인 푸념을 들었다. 생활비가 좀처럼 줄지 않는다는 혼잣말 같은 거였다. 당장 수입이 없으니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을 곶감 빼먹듯 조금씩 축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대로라면 국민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 크레바스(Incime Crevasse)를 넘기기 힘들 것 같았다. 힘든 시기가 코 앞이라 생각하니 위기감이 몰려왔다. 아내로부터 수년 동안 적어온 가계부를 받아 들고 지출 내역을 정리해 보았다. 평소 알뜰살뜰 살림해온 대로 허투루 낭비한 것은 없었다. 적금, 보험료, 관리비 등 고정 지출 항목을 제외하고 일반 생활비가 줄어야 하는 데 줄지 않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면서 나름대로 생활비를 줄인 나만의 처방 3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생활비 지출의 패턴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대부분 시장을 보고 나면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고 있었다. 신용카드는 사실 외상거래나 다를 바가 아니었다. 당장 현금이 없어도 사용승인이 나므로 소비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필요한 거래나 가격비교 없이 이루어지는 거래가 많았다. 급여를 믿고 신용거래하는 방식, 즉 신용카드 중심의 소비 패턴이 문제였다.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생활비 지출을 위해서는 서둘러 신용카드 사용을 중지하는 것이 답이었다. 7개나 되는 신용카드를 잘라버리고 체크카드를 새로 만들었다. 체크카드에는 계획된 한 달 생활비를 넣어두고 쓰도록 했다. 처음엔 익숙지 않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2) 보험의 통폐합 리모델링
대개의 가정이 그렇듯 우리도 많은 보험 상품에 가입해 있었다. 친척, 지인들의 권유에 의해 마지못해 들었던 보험들이 퇴직하고 나니 솔직히 부담되었다. 상품 하나하나의 보험 내용을 따지고 약관을 체크하면서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가입한 보험 상품 전체에 대해 컨설팅을 받았다. 실손 보험이나 암 보험처럼 노후 들어서도 꼭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슬림화에 나섰다. 상품의 가짓수뿐 아니라 중복되는 내용을 통폐합하고 보니 수십만 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하기보다 지인들의 권유에 마지못해 들었던 보험이 문제였다. 퇴직하니 이렇게 숨겨진 낭비 요소의 척결이 정말 필요했다.
3) 경조사비의 현실화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여기저기 챙겨야 할 경조사가 많아지게 된다. 특히 대인관계가 넓거나 지위가 높을수록 챙겨야 할 경조사가 많았다. 퇴직하고 소통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경조사는 더 잦아진 것 같았다. 많게는 한 달 경조사비가 백만 원에 육박한 적도 있으니 적잖은 부담이라고 아니 할 수 없었다. 인간관계상 지인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도리인 줄 알지만 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면 이건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조사비가 상호 부조의 성격도 있다 보니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어느 날 휴대폰의 전화번호를 정리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생 단 한 번의 인연으로 끝난 사람도 있고 향후 지속되지 않을 인연도 있을 텐데 전부를 챙긴다는 것은 무리다.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체면과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끝까지 함께 할 소중한 관계가 아니라면 경조사거품을 빼기로 했다. 우선은 나부터 알리지 않고, 친소 정도에 따라 챙겨야 할 경조사의 기준도 정하였다. 체면치레를 위한 그 동안의 허례허식이 눈에 띄게 검소해졌다.
퇴직하고 나서야 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입이 없는 만큼 생활 규모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여야 했다. 관계, 체면, 도의 이런 것들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현실 생활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퇴직하면 하루라도 먼저 생활비에서의 낭비 요소를 없애는 것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