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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셍지 Sep 24. 2021

영화 <해피투게더/춘광사설>, 1998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



Happy Together, Kar Wai Wong, 1998


0. 홍콩과 대화

어제는 와인과 맥주를 섞은 죄로 괴로웠다. 속을 달래려 부모님을 이끌고 감자탕 집에 갔다. 더러운 속이 무색하게 감자탕은 맛있었다. 신이 나서 아빠에게 다음에는 양장피, 팔보채 같은 중식을 먹자고 했다. 딤섬도 종류별로 먹자고 졸랐다. 엄마는 상황이 나아지면 홍콩여행을 가자 했고, 아빠는 90년대 압구정 고급 중식당에 대해 말해 주었다. 갑자기 왜 음식에 꽂힌 거냐고 묻길래 최근 본 홍콩영화를 이유로 대었다. 부모님도 한창 때 많이 보았다 한다. 아빠는 영화가 담긴 usb를 갖다 주겠다 했고, 엄마는 장국영이 동성연애자라고 했다. 나는 엄마 입에서 나온 동성연애자라는 말의 어감이 어색해서 잠깐 웃었다. 엊그제 본 <해피 투게더>가 바로 동성연애 서사 영화라 덧붙이고는 감자탕 한 덩이를 이어 먹었다.



1. 서사는 거들 뿐

홍콩영화에 꽂혔다지만 내가 본 건 <아비정전>과 <해피 투게더> 둘 뿐이다. 처음 <아비정전>을 보면서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가 의문스러웠기에 영화가 물에 물 탄 듯 밍숭맹숭했다. 술에 술 탄 듯 아련하게 젖어들어가는 분위기만을 즐겼다.


하지만 <해피 투게더>를 보면서는 등장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하게 됐다. 감독은 인물 개인의 감정선을 보여주기 식으로 간접조명한다. 중간중간 과하다 싶게 오래 잡히는 정적인 쇼트와 특유의 나레이션, 인물들 간 묘한 엇갈림과 배우들의 미친 연기는 영화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분위기가 고조되다 극적인 순간에 흘러나오는 ost는 짜릿하기까지 하다. 영화 내내 인물의 삶에 한껏 녹아들어서, 배경이 세트장이고 인물이 배우라는 사실이 거짓 같았다. 사람들은 보통 영화에서 이야기를 찾지만, 때때로 서사는 거들기만 한다. 우리의 삶은 서사지만, 우리의 기억은 장면인 것처럼 말이다.



2. 어떤 정적은 감정을 낳고

영화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씬에는 인물의 대사가 없다. 정적이 감돌거나 음악만이 흐른다. 이를테면, 주인공 아휘와 보영이 택시 안에서 서로 기대어 있는 장면이라든지, 둘이 함께 탱고를 추는 장면이라든지, 아휘와 보영이 각각 숨죽여 눈물 흘리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강렬했던 건 쏟아지는 이과수 폭포를 다각도로 돌려가며 조명하는 장면이었다.


거대한 자연 아래 한낱 우리의 삶. 백 마디 말보다 잠깐의 침묵이 더 많은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짧게나마 극도의 무력감을 느꼈다.



3. 거꾸로 본 홍콩은 어떨까?

영화의 배경은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다. 90년대 말 홍콩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이 반영됨은 물론 '지구 반대편, 단 둘'이라는 설정은 그들만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홍콩- 아르헨티나-세상의 끝 아슈이아-대만-다시 홍콩'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이동과 더불어 아르헨티나 내에서의 공간 변화 또한 눈에 띈다. 아휘의 일자리가 변함에 따라 영화의 배경이 변하고, 아휘와 보영의 관계도 변곡점을 맞는다.


아휘가 웨이터로 근무했던 ' 수르'에선 아휘와 보영이 재회한다. 다친 상태의 보영을 돌보던  시기의 아휘는 "사실 그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다. 아픈 그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후 바의 사장을 때리고 직장에서 짤린 아휘는 음식점 주방에서 근무한다.  과정에서 아휘의 주방 동료 '' 우연히 통화한 보영은 아휘를 의심한다. 어느덧 다친 보영은  나았고, 여기저기 외출하는 보영이 아휘는 못마땅하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  보영이 떠난 걸까 불안한 아휘는 가게에서 담배갑을 쓸어 방에 놔둔다. 명장면이다. 보영은 자신을 가두려는 아휘의 행동에 쌓인 담배갑을 던져버린다. 관계는 다시금 파국으로 치닫고 아휘는 마지막 직장인 도살장으로 향한다. 홍콩에 돌아가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묵묵히 입을 닫고 일에 몰두하는 아휘를 보면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모든 서사를 아우르는  하나의 공간이 있다. 아휘의   칸만은 수많은 감정과 배경의 변화에도 변함없다. 떠난 보영이 몇 차례 돌아오고 아휘는 그를 계속 받아주지만, 결국 방을 떠나 숙소가 딸린 마지막 직장, 도살장으로 간다. 크고 작은 상징이 가득한 영화에서, 도살장은 가장 직접적인 전환의 상징이다. 변함없었던 아휘의 방도, 아휘도 공간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아휘는 떠나고, 아휘가 떠난  방을 보영이 다시 메운다. 반복되지만 엇갈린다. 함께 있어도 어딘가 어긋나 보이는 그들은 배경에 오롯이 녹아든다. 영화  방이 세트장이고, 감독의 카메라가 어딘가에 위치해있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 이유이다.



4. 어긋나는 우리네 삶

그들의 어긋남은 거짓말처럼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 같은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은 시간선에서 엇갈리고, 감정선에서 또한 엇갈린다. 아휘와 보영은 방에서 몸을 맞대고 함께 탱고를 추었지만, 이제는 보영 혼자 남아 아휘가 떠난 '바 수르'에서 탱고를 춘다. 아휘가 사다준 수많은 담배갑을 던져버린 보영은 아휘가 떠난 방에 수많은 담배갑을 다시금 쌓아둔다. 아휘는 장이 쥐여준 녹음기를 켜고 밖에서 숨죽여 울었고, 보영은 아휘가 떠난 방에서 뒤따라 운다. 아휘는 떠나기 위해 울었고 보영은 붙잡고 싶어 운다. 아휘는 도살장 바닥에 배인 핏물을 빼기 위해 바닥을 닦았고, 보영은 아휘가 떠난 방 바닥을 오래도록 닦는다. 아휘는 지우기 위해 닦았고 보영은 기억하고 싶어 닦는다. 같은 행위임에도 그들은 이토록 엇갈린다. 이들의 엇갈림은 영화를 관통하는 이미지인 '이과수 폭포'에 이르러 폭발한다. 이야기의 시작, 보영이 가자고 했던 이과수 폭포를 이야기 끝에 이르러 아휘 혼자 간다.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5. 폭포에서 흐른 물이 다시 쏟아지기까지

영화 초반부, 유일한 칼라 장면은 '이과수 폭포'다. 이 폭포는 과하다 싶을만큼 오래 조명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서 다시금 오래, 언제까지고 흐르는 폭포수가 재조명된다. 영화는 아휘와 보영 둘의 이야기로 시작해 갈수록 아휘의 이야기만을 다룬다. 나는 남겨진 보영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남겨져버린 보영을.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하지만 그 쏟아짐은 언제까지고 반복된다. 삶이 서사고, 기억이 장면이라면, 반복되는 폭포의 장면을 회상이라 할 수 있을까?



6.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

<해피 투게더>의 원제는 <춘광사설>으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이란 뜻이다.


어떤 기억의 색채는 선명하다. 흑백으로 출발한 영화는 아휘와 보영의 재회의 순간부터 칼라로 탈바꿈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에서 왕가위 감독은 "<해피 투게더>는 커다란 마침표 같은 거예요. 인생에서 어떤 기간이 끝나버린 후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그런 일이 아닐까? 수없이 많은 문장의 반복과 단어의 어긋남을 거기에 남겨놓는 것. 다만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침표 앞의 글들이 퇴색되거나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백의 시간들 속 채색되는 어떤 순간과 희뿌연 구름들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 일기에 덧없지 않다는 말을 눌러 쓰며 울었다. 술김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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