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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Jan 31. 2022

엄마의 집안일

집안에서 만보 걷기

  아침, 아이들이 빠져나간 방에 들어가서 벗어놓은 잠옷과 침대 위에서 흘러내려온 이불을 보면 화가 치미는데 화를 내도 소용없으니까(어차피 애들도 없다) 그냥 치운다. 그냥 치우고 있으니 성이  풀리니까 가상의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준비가 일찍 끝났으면 모여서 까불지 말고, 자기   치우고 나가면 얼마나 좋으냐. 엄마가 들어올  뻔히 알면서도 이러고 가냐. 밖에 나갔다 오면 방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으니 정말 마법이 따로 없겠다.

  잔소리의 대미가 늘 그렇듯 끝에는 엄마가 어릴 땐 말이야, 로 이어지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도 등교 전에 방을 치운 적이 없다. 아직 눈도 잘 떠지지 않는 상태로 밥을 먹고, 씻는둥마는둥 얼굴에 물을 묻히고서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는 매일매일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흐트러진 이불도, 벗어던진 잠옷도, 어지러운 책상도 마법 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내 ……는 어디다 치웠어!”

  기억이 여기에 이르면 나는 가상의 아이들에게 잔소리 하는 것을 멈추고 마음속으로도 묵묵해져서 손만 움직이게 된다. 너무나 휴지 같아 보이는 구겨진 종이조각도 버리지 않고 일단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게 설령 어제도, 그제도 본 그 종이라 해도 말이다.


  한편 요즘 나는 새로운 욕실 청소 루틴을 개발해서 매우 의기양양한데 설명하자면 이렇다. 일단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목욕을 하면 자원도, 내 기력도 아까워서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땀을 흘릴 정도로 뛰어야 한다. 땀도 안 났는데 목욕을 하면 지원도, 내 기력도……(이하 생략). 목욕을 하고 물기를 닦은 다음, 환풍하기 전에 욕실 청소용 스프레이 세제를 뿌리고 나온다.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보디로션도 바르고, 생각이 나면 젖은 수건으로 세면대도 좀 닦고서 다시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제를 씻어 내려 보내는 것이다. 가끔 솔로 문지르는 청소가 필요한 날에는 모발에 도포하고 시간을 두어야 하는 트리트먼트를 한다. 머리에 린스 바른 채 거울을 닦지 않는 주부는 없을 것이다. (아닙니다, 물론 다양한 주부가 있죠) 이러다 보니 실제로 씻고 닦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 목욕으로 간주되는 시간은 무한정 길어진다. 이제 겨우 청소를 끝내고 내 몸 좀 단장하려는데 밖에서 누가 꼭 엄마를 찾아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문을 열면, 여태껏 뭐 했냐는 눈빛이 나를 올려다본다.


  여유가 있어서 크림을 꾹꾹 눌러 바르고 천천히 머리를 말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도 목욕을 하면 한 시간씩 걸렸는데. 그때도 정리하고 나오는구나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어디까지나 엄마가 목욕한 뒷정리이지 대대적인 욕실 청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욕실 청소를 왜 매일하겠어? 욕실은 비누와 물이 만나 마법적인 효과가 일어나는 공간인데. 엄마의 긴 목욕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가족들은 곧잘 밖에서 화장실을 못 쓴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엄마는 꿋꿋이 목욕을 마친 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와서 콜드크림을 꾹꾹 눌러 발랐다.

  후끈후끈한 목욕탕. 젖은 변기. 투덜투덜.


  결국 집안일을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리고, 따라하든 반면교사로 삼든 계속 참고하는 타인의 집안일은 엄마의 집안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의 집안일에는 정통하냐면 그렇지도 않다. 엄마 역시 가족이 있는 시간을 피해서 몰래 집을 쓸고 닦았던 고립 집안일인이었기 때문이다. 전업주부도 아니었던 엄마가 어느 틈에 집안을 돌보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바로 앞에서 쓸고 닦는 데도 내 눈에는 그게 그렇게 안 보였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집안일을 생각하다보면 마지막에 꼭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일이 있다. 좀처럼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 엄마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어놓는 일은 가끔 부탁하곤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자신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고 또 바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일을 굳이 시키는 엄마를 내심 원망했다. 엄마가 밤에 와서 하면 될걸. 방에서 뒹굴거리면서도 엄마의 부탁이 자꾸 떠올랐다. 아예 까먹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는 손가방만 내려놓고 바로 뒷베란다로 향했다. 아이고, 참. 대충이라도 좀 널어놓으라니까. 나는 방에서 듣는 둥 마는 둥(을 연출하며) 대꾸했다. “아, 깜박했어.”
  여름이었다. 하루 종일 세탁기 속에 방치된 젖은 옷이 떠오를 때마다 밖에서 일하며 엄마가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지, 이제는 안다. 비누와 물이 만나도 아무런 마법이 일어나지 않으니 욕실 청소라는 것을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안다. 빨래를 널고 있으면 열 번에 한 번은 그 때 그 날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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