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만보 걷기
스마트워치란 아직 쓰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별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무언가 최첨단, 어쩐지 현대인의 필수품 같은 느낌인데 잘 보면 기껏해야 스마트폰의 열화 버전. 시계라 쳐도 예쁘지 않다. 물욕 때문에 괜히 기웃거리다가 정신 차리면 되돌아서게 만드는 많은 물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마트워치였다.
뛰기 전까지 그랬다.
코로나 시대는 나에게 뛰는 삶을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집안일과 온종일 식구로 복작대는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뛰었다. 그러다 보니 기록이란 것이 쌓였다. 기록이 쌓이니까 욕심과 목표도 생겼다. 일주일에 몇 번 뛰겠다, 한 달에 몇 킬로 뛰겠다. 뛰다 걷다 하는 사람에서 (내 기준) 제법 뛰는 사람이 되었다.
달리기는 장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운동이지만 꼭 갖추어야 할 것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발에 맞는 러닝화.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 아, 스마트폰. 강변에서 뛰다 보면 어떤 기계에도 의지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뛰는 러너들도 있지만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기록이 등을 떠밀고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줘야 다리가 움직인다.
처음에는 손에 들고 걷다가 뛰다가 웹서핑도 하다가, 쉬지 않고 5km를 뛸 수 있게 된 후에는 암밴드를 찼다. 이 물건이 기대만큼 편하지 않았다. 자꾸 흘러내리고, 흘러내리지 않게 팔에 힘을 주고 달리면 상반신 전체가 뻐근해졌다. 이 문제로 한참을 고민하던 중 벼락처럼 계시가 떨어졌다. 이제 스마트워치를 사도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매일 뛰는데? 계시를 받은 애플워치가 내 팔목으로 내려왔다. 메인화면에는 러닝앱과 풍속 정보를 띄워 놓았다.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시간 별 바람세기를 확인하며 오늘은 언제쯤 나가서 뛸 수 있을지 가늠했다.
무거운 핸드폰에서 벗어나니까 좋았다. 가벼워진 몸에, 정말 좋아진 기록에 신이 난 나머지 능력치 이상으로 뛰다가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스마트워치를 산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다. 원래는 운동할 때만 차려고 했던 것을 걸음수를 잰다, 심박수를 잰다하며 하루 종일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마트워치가 진가를 발휘하는 뜻밖의 순간을 만났으니 바로 집안일을 할 때였다.
집안을 내 몸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 나는 무언가를 집안에 두었으면 내 몸에 지닌 것과 다름없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 같다. 늘 손에 들고 있는 것 같던 핸드폰도 사실은 집안 어디에 놓아두었다가 메시지라도 왔나 궁금해지면 찾아다닐 때가 많았다. 집안일을 할 때는 두 손이 자유로운 겨를이 별로 없는 것이다. 설거지할 때야 말할 것도 없고, 빨래를 걷고 널 때, 식재료를 씻고 썰 때, 흐트러진 물건을 줍고 가구를 닦을 때 바삐 움직이는 건 언제나 두 손. 한 움큼씩 일을 마치고 (대체로 어디에 두었는지 잘 모르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바로 답했으면 좋았을 메시지가 왕왕 들어와 있었다. 그럼 나는 바빴다고 쓰려다가 손을 멈춘다. 내가 정말 바빴나 검열하고 마는 것은 무급 노동자의 숙명 같다. 끝내 바빴다고는 못하고 정신이 없었다고 교정하고 마는 것이다.
드물게 놓치면 안 되는 전화도 있었다. 그중 제일은 학교 양호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다. 우리 동네 초등학교는 아이가 병이 나서 조퇴를 해야 하면 보호자가 대략 30분 안에 데리러 가야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맞벌이의 경우 어떻게 하는가? 뛰어 나가는 내 머리에 늘 물음표가 떠오르지만 아이를 데리고 오면 결국 잊게 되어, 이 부분은 여전히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아무튼 스마트워치 덕분에 나는 더욱더 칼 같이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는 보호자가 되었다. 바쁨을 정신없음으로 고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 시계를 찼다고 손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가끔 물건을 잔뜩 든 채, 지구방위대처럼 손목에 대고 통화를 할 때도 있다. 이게 과연 스마트한 자세인가 의구심이 들지만 뒤늦게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를 연발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집 밖에서도, 옆에 누가 있어도 꿋꿋하게 손목시계로 전화를 받는다.
나는 이제 거의 확신하고 있다. 스마트워치는 누구도 아닌 바로 주부의 필수품이라고. 사고 나서 쓸모를 발견하는 물건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