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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Feb 14. 2022

주부의 달리기

집안에서 만보 걷기

  언젠가부터 ‘일주일에 몇 번 운동하십니까?’라는 질문이 무섭지 않다. 무섭긴, 도리어 반갑다. 달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니 2019년에는 고작 130km를 뛰었는데, 2020년에는 490km, 2021년에는 780km를 뛰었다. 올해 목표는 1,000km를 달성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달리기는 코로나와 함께 시작되었다. 2020년. 그 해는 원래 나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해였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동시에 막내가 유치원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2009년 첫째가 태어나면서 시작되었던 기나긴 육아에 종지부를, 아니 종지부를 찍으면 안 되지, 하지만 적어도 일단락은 지을 예정이었다. 이제 매일 내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9시부터 14시까지. 다섯 시간.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2016년에 막내가 태어나고 꼬박 집육아를 했던 나에게는 짧다고 치부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일단 동네를 벗어나 보고 싶었다. 전시회를 다니고, 영화를 보고, 서점을 다니고 싶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을 다시 한번 좋아해 보고 싶었다. 아이 둘을 앞뒤로 태우고 자전거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리에서만 맴도는 삶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나는 아이를 낳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이 활동을 재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고립 육아인에서 일반 사회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리허빌리테이션.

 

  하지만 훈련은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두 아이의 입학 및 입원이 기약 없이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복귀가  무어냐. 다섯 식구가 꼼짝없이 집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나는 고성능 집안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하루 종일 집안을 종종거리며 치우고 닦았다. 집안에 있는 사람 수와 그들의 생활 시간에 비례해 집은 헐고 상했다. 인간에 이렇게 집에 해롭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늘어난 집안일 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밥이었다.

  삼시 세끼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인원수를 곱해야 진짜지. 스테이 홈이 막 시작된 무렵에는 지혜(이를 테면 어른은 두 끼만 먹어도 된다)가 없어 매일 15인 분의 밥을 꼬박 만들었다. 그야말로 치우고 돌아서면 밥하고의 연속이었다. 밥하는 기계가 된 셈 치고 밥만 붙들고 있으면 끝인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돌봐야 할 세 아이, 영문을 모른 채 집에 갇힌 들개……아니 생때같은 자식이 있었다. 하지만 밥하는데 애들이 다리 붙잡고 징징거리면 칼을 던지고 싶지 않냐는 옛 성현의 말씀도 있지 않는가(없다고요?).

  미칠 것 같았다. 단 몇십 분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갈 곳도 없었고, 명분도 없었다. 밥 하다 말고 어딜 가냐는 내면의 물음에 나는 칼을 던지는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한다는 사람은 웬만해선 막을 수 없으니까.


  이게 내 달리기의 시작이었다.

  러너스 하이 같은 것은 모르겠다. 달리고 있으면 무념무상하게 정신이 맑아지는 것도 아니고 온갖 잡생각이 다 몰아친다. 놀랍게도 살이 빠지는 것 같지도 않다. 건강해진 조짐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달릴 때는 혼자 있을 수 있다. 그것만 보장되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뛰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강변을 달리고 돌아와 하루를 시작하는 멋진 러너가 되었습니다. 해피 엔딩. 이렇게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가 아니라 주부의 달리기이기 때문이다. 던진 칼은 다시 주워 와야 한다.


  둘째와 셋째는 원래 입학식에서 2개월이 지난 2020년 6월 겨우 소속될 곳에 소속되었지만, 그 후로도 지금까지 '일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에 갔던 아이들이 갑자기 돌아온다. 재택근무 보름 만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쾌재(!)를 부르다가도 이 마음 때문에 나쁜 병이라도 걸려 올까 봐 무서워진다. 막내 유치원은 올해 들어 세 번째 휴원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목표는 여전히 1,000km를 뛰는 것이다.


  단 30분만 달린다고 해도 준비하는 시간, 강변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시간, 돌아와서 씻는 시간, 씻고 나서 욕실을 청소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1시간 30분은 족히 소요된다. 하루 동안 한 시간 반의 운동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엄마와 주부를 겸하는 사람에게는 지난한 일이다. 손바닥만큼 있는 내 시간을 유급 노동에 할애해야 하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밥 차릴 시간에 나갈 수는 없다. 대신 애 봐줄 사람(=남편)이 바빠서도 안 된다. 밥도 다 먹이고, 누가 애를 봐줘도 그때 바람이 몰아치거나, 너무 춥거나, 혹은 너무 더우면 뛸 수 없다. 집안일하는 틈틈이 스마트워치를 보며 기회를 노린다. 좋아, 풍속과 기온을 분석한 결과 오늘은 세 시쯤 나갈 수 있겠어. 아니, 회의해야 한다고? 그럼 저녁 먹고 가야겠군. 뭐? 그때부터 공부를 봐달라고? 그럼 재우고 나가야 하나? 9시부터 비가 내리잖아!


  주부의 달리기는 의지만으로 이룰 수 없다. 하늘의 뜻이 필요하다. 좀 많이.


  수많은 제약과 방해를 물리치고 러닝복으로 갈아입으면 이 시간에 왜 갑자기 뛰냐는 배우자의 눈빛과 엄마 어디 가 가지 마 같이 가, 라는 아이들의 3단 징징거림이 발목을 잡는다. 그럴 때는 이슬아 작가의 산문집에서 본 그레이스 페일리의 시 <시인의 대안>이 떠오른다. ‘시를 쓰는 대신/파이를 만들었지……모두들 이 파이를 좋아할 거야’

  집과 가족을 돌보는 대신 달리는 건 누구를 기쁘게 할까. 1000을 12로 나누면 83.333…니까 목표를 달성하려면 한 달에 적어도 84km를 뛸 필요가 있다. 하루에 5km를 뛴다고 치면 매달 17번 뛰어야 하는 것이다. 매주 네 번 뛰고, 한 주는 한 번 더 뛰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다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집안을 말끔히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잠자리를 봐주면 모두가 기쁜 것 아닐까.

  나는 현관까지 쫓아 나온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엄마는 혼자 뛰고 올게.”

  힝, 하고 볼멘소리를 내는 아이가 마음을 찡하게 하지만,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 일은, 그래, 나를 기쁘게 한다. 하루에 한 시간 반, 내 기쁨을 위해 쓰길 주저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이 어쩌면 재활 훈련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맞벌이가 아니면 아이를 맡기기 어려워서 공립 유치원에 보내려면 기본적으로 그 해 4월 기준으로 만 네 살이 되어야 해요.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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