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만보 걷기
처음 보는 악보를 그대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초견이라 부른다고 한다. 어쩌면 요리에도 초견이 있을지 모른다. 만들어 본 적 없는 음식을 레시피만 읽고 바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늘 먹는 반찬만 만드는 것 같아서 모처럼 레시피북을 빌려 왔다. 제목은 <야채 요리 100 접시>.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며 사진을 감상한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만만해 보이는) 접시가 나오면 요리명을 읽는다. ‘소송채와 豆苗 오일 조림’이라. 좋아, 마침 소송채 요리를 하나 배우고 싶었어. 볶음이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재료란을 읽어 본다.
소송채, 오케이.
豆苗?
쇼가. 쇼가는 생강.
한국말로는 생강과 마늘을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데 쇼가와 닌니쿠(마늘)는 매번 입 안에서 발음해 보고 머릿속에서 한국말로 번역해야 마음이 놓인다.
나머지는 올리브 오일, 굵은소금, 후추였다. 재료도 어려울 것 없다. 모처럼 만만한 요리를 발견했으니 매번 글자만 보고 넘기던 豆苗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豆苗, 토-묘-, 두산백과에 따르면 더우미아오. 완두콩싹이라고 한다. 먹어 본 적 없지만 자주 가는 마트 어디쯤에 있는지는 아니까 괜찮다.
재료를 보고 마음이 놓이면 드디어 요리 방법을 읽는다. 소송채는 5cm로 자르고 완두콩싹도 비슷한 길이로 자른다. 생강은 얇게 썰기. 두꺼운 냄비에 넣고 소금과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뚜껑을 닫는다. 흠흠. 불 세기 체크, 시간 체크.
이렇게 요리 하나를 머릿속에 새겨 넣기까지 나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편이다. 복잡한 요리는 노트에 다시 정리해 보기도 하고, 실제로 요리할 때도 몇 번씩 레시피를 들추니 요리에 초견 시험이 있다면 내 실력으로는 실기 불합격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읽는 대부분의 레시피북이 외국어로 쓰여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외국 생활이 짧지 않은데도 식재료 이름은 이상하게 몸에 속속들이 스미지 않는다. 에린기, 사바, 가타로스를 새송이, 고등어, 목살로 바꾸어야 비로소 뽀독뽀독한 식감과 고소한 비린내와 담백한 육즙이 떠오른다. 먹어본 적 없는 재료가 등장하면 안 그래도 없는 용기가 한풀 더 꺾인다.
힘들여 재료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다음엔 분량이 어렵다. 평소 그램 수를 따져서 사는 고기류는 가늠할 여지가 있지만, 채소가 그램으로 나오면, 흠. 콩나물 200그램이라? 액체류도 일일이 애용 계량컵을 머릿속에 그린 다음 그 안에 따라 보아야 감이 온다.
게다가 레시피가 보통 2인 기준으로 나오는 것도 난관이다. 읽을 때는 그냥 읽으면 될 텐데 나도 모르게 자꾸 5인용 분량으로 환산해보게 되는 것이다. 곱하기 2에 더하기 가로 치고 나누기 2 가로 닫고. 평생 수포자의 길을 걸어온 나로선 이게 또 반복하기 쉬운 계산이 아니다.
숫자만 보면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지는 체질(그렇다, 체질이다)은 만드는 법을 읽을 때도 문제가 된다. 5cm 길이로 썰거나…… 0.5mm 두께로 자르거나……. 그럴 때 나는 자주 손가락을 보는데, 그렇다고 손가락의 길이나 두께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고군분투해서 레시피를 읽고 나면 대부분 ‘그래, 일단 만들지 말자’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검증되지 않은 요리를 식탁에 올리는 것은 위험하고, 이 검증을 머릿속에서 끝내기 위해서는 치밀한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맛없는 음식을 올렸다가 아직 인사치레라는 것을 모르는 어린것들의 포화 같은 비난을 받을 생각을 하면 의욕이 싹 사라진다. 어쩌면 내 레시피 초견 무능력은 외국어 실력이나 숫자 멀미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용기 없음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 입뿐 아니라 다른 식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래도 도전에 소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루에 두 끼(한 끼는 학교 급식이니까 뺐다. 주말도 있고, 도시락도 있지만 인심 썼다), 일주일에 열네 끼, 다섯 사람의 70인분 식사를 매일 똑같은 걸로만 차릴 수는 없으니 오늘 뭐 해 먹을까는 매일의 과제이자 넘어야 할 벽이다. 머릿속에 저장된 레시피를 뒤져 보지만 내장된 요리책이 부실하다. 불고기는 어제, 고등어구이는 그제 먹은 것 같을 땐 광활한 정보의 바다, 유튜브에 접속한다.
동영상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에 늘 불신감을 품어왔고, 지금도 그런 편이다. 브이로그가 한참 흥하기 시작할 때도 글로 쓰면 한 문단에 끝날 내용을 구구절절 읊는 게 도리어 시간 낭비 같았다. 하지만 요리는 다르다. 두뇌를 짜내야 하는 이미지화 작업을 남이 대신 해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요리책에서는 들어가는 말에 한데 묶여 정리되기 일쑤인 살림도구가 실제로 쓰이는 걸 구경하는 재미도 좋고, 요리하는 사람의 숙련된 손놀림을 보는 것도 공부가 된다. 외국어는 물론이요 출산과 육아도, 집안일도, 심지어는 운동까지 책으로 먼저 배우는 나지만 요리만큼은 시청각 자료만 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저녁도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냉동고도 슬슬 빈 자리가 보인다. 그러면 '저녁 메뉴 추천, 간단'을 유튜브에 검색해 본다. 마파두부, 강된장, 제육볶음 등등등. 오, 영감이 밀려온다. 필요한 재료를 메모 앱에 적어 넣고 마트에 간다. 나간 김에 도서관에 들른다. 여전히 레시피북에 손이 간다. 어쨌든 요리책을 읽는 건 즐거우니까. 아름다운 사진만 감상하고서 만드는 법은 허투루 보고 반납한다는 것은 조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