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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Aug 13. 2020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사랑이다

육아 십년

  첫째 때 모유수유를 실패한 이유는 첫 모금을 먹이지 못한 탓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입원실에서 정신을 차리고 났더니 아기가 분유병을 물고 나타난 것이다. 아, 저렇게 쉽게 빨 수 있는 분유병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동원해야 배를 채울 수 있는 엄마 젖에는 관심을 잃을 텐데! 내 유선도 또한 출산 직후 자극을 받지 못했으니 충분한 양을 낼 수 없을 텐데! 우려대로 유축양은 젖병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했고 곧 혼합수유를 시작해야 했다. 검진을 가서 수유 형태를 체크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좀 더 노력하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기를 위해 충분히 고생하셨어요? 하고 누군가 힐난할 것 같아서.


젖은 아기 배를 채울 만큼 나오게 되어 있는가

  둘째의 탄생은 설욕의 기회이기도 했다. 마침 출산 병원도 모유수유를 매우 강조하는 곳이었다. 임신 후기 때는 조산사에게 모유수유 면담을 받기도 했다.

  “모양이 아주 좋은데요.”

  물론 가슴을 드러내고.

 “정말요? 첫째 때는 잘 안 됐어요. 제 생각엔 바로 물리지 못한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저런, 그럴 수 있어요. 엄마 젖은 아기가 빨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빨면 빨수록 더 많이 나오죠.”

  참고로 문제의 첫째는 잘 자라고 있었다. 문득 불안에 휩싸여 소아과 선생님께 “눈 밑이 좀 거뭇거뭇해 보이지 않나요? 혹시 영양부족....?” 하고 물어보면 선생님이 “아, 아니고요.”하고 정색하실 정도로.

  둘째는 유도제를 맞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태어났다. 갓난아기가 가슴 위에 올려졌다. 어깨를 덮은 보송보송한 배냇털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아기는 귀여웠고, 저 배냇털은 곧 빠지는 건가, 가르마도 탈 수 있겠는데,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간호사가 다가와 “젖 물려 보시겠어요?”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아기는 양쪽 젖을 조금씩 빨고 산후 처치를 받기 위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나는 과다출혈로 잠깐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젖을 물렸다. 수유 간격이 좀처럼 좁아지지 않아 불안했지만, 아기가 빨면 빨수록 젖은 더 돌 거고 내 몸은 내 아기 먹일 젖은 낼 수 있을 것이었다. 아기와 엄마가 그런 식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너무 달콤한 논리였다. 젖꼭지가 갈라지고 절개한 회음부가 다시 찢어질 것만 같았어도 제대로 된 엄마라면 그런 고통을 피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믿었는데 이 분투의 결과는 아기의 입원으로 돌아왔다.

  황달 수치가 급격히 높아진 아기는 퇴원한 지 사흘 만에 GCU(신생아치료회복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푸른빛 치료기 안에 아기를 홀로 남겨 두고 나만 병원을 떠나야 한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다행히 상태가 빨리 호전되어 퇴원하는 날, 제대로 영양을 공급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아직도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유가 아니어도 괜찮나요?” 의사의 대답은 간결했다.

  "분유로 충분합니다.”


  세 번째 출산 준비에서는 젖병 선택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몇 개의 후보를 골라 후기를 읽고 또 읽으며 몇 달 동안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는 출산 가방 속에 처음부터 자리를 잡았다. 작은 유리병에 그려진 작은 나비와 구름이 병원에서 혼자 분유를 탈 때 큰 위안이 되었다.

  분유수유 친화적인 내 태도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황달은 그냥 둬도 낫는데. 병원을 바꿔보지 그랬어. 더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 아니냐는 말들이 속상했다. 그런 날에는 아이들의 이런 증상, 저런 문제가 혹시 완모를 못 했기 때문은 아닐까 새삼 걱정되었다. 해봐서 아는 사람들이 더 박하게 굴 때가 있었다.


엄마는 왜 말을 안 해주고

  안 나오는 젖을 짜내어 막내를 먹이고 침대에 뻗어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셨다.

  “젖 먹이면 힘들지. 등뼈가 다 비틀리는 것 같고.”

  “엄마도 이렇게 힘들었어?”

  “힘들었지, 그럼.”

  엄마는 내가 모유수유를 못하는 걸 제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이었고, 나는 당연히 엄마가 수월히 젖을 먹였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힘들게 먹이고 키우는 거라는 엄마의 말에 우선 기가 막혔지만(아니, 그 힘든 걸 나보고도 하라고 가물치까지 잡아 먹였단 말이야?), 왜인지 모르게 마음도 놓였다. 흠, 내가 못한 게 그래도 아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거군.

  결국 둘째도 셋째도 백일 전에 모유수유를 끝내고 완전 분유수유로 돌아섰다. 아이들은 때때로 아프기도 하고 이상할 정도로 기운이 넘치기도 한다. 막내가 아직 아기일 때는 종종 “그때 내가 모유수유를 못 해서...?” 하고 회한에 잠기기도 했지만 이제 삼겹살을 세 조각씩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는 아이를 앞에 두고 있으면 뭐가 됐든 분유 탓할 시기는 지난 것 같다.

  그때 그때 너무도 컸던 문제들이 아이가 자라며 마치 없었던 일처럼 기억의 한 켠으로 물러난다. 물론 그 자리에는 더 힘들어 보이는 새 문제가 주저앉고, 나만 뭘 모르고 못하는 것 같은 불안만 그대로다. 다시 십 년이 지나 되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사랑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은 남기고 싶다. 일단 이 마음을 놓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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