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쇼샤나 Sep 21. 2017

보통 사람은 벽을 넘을 수 없기에 부숴야 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며 느꼈던 아쉬움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한 구석이 있었던 영화다.


세 흑인 여성들은 뛰어난 사람들만 모여 있다는 나사에서도 손꼽히게 뛰어나다. 그들의 능력은 인종과 성별 때문에 감춰져 있다가 화려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다소 걸렸던 것이 주인공이 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손쉽게 인정받고 승승장구하게 된다는 거다. 그들 이전에도 뛰어난 흑인이 왜 없었겠는가. '그전까지 인정받지 못하던 흑인들이 왜 하필 그 때 인정받게 됐는가?' 라는 질문에 이 영화는 '그들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 때는 자연스럽게 오지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은 그릇된 행동이라는 도덕적 인식 없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196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 흑인들의 민권 운동은 이 뿌리를 흔들었다. 흑인 분리가 차별이라는 인식이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흑인을 무시하는 행동에 약간이나마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는 점점 커져 갔다. 결국 뛰어난 인재라면 흑인도 백인처럼 대우 받으며 일해야 한다는 원칙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자리잡게 됐다.


1960년대만 해도 흑인들은 유색 인종용이라고 적힌 건물 입구와 화장실을 이용했다. 이 관행은 차별이기에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뀔 수 있었다. 단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백인과 동일한 화장실을 사용하고, 같은 출입구를 오고가야 한다는 반성으로 이어졌을 리는 없다. 그전까지 분리는 곧 차별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었을 테니까. 차별이 차별로 인정받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비단처럼 매끄럽게 해결되는 갈등은 뭔가 이질적이다.


게다가 캐서린, 메리를 발굴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모두 백인 남성이다. 특히 가장 비중이 높은 캐릭터인 캐서린의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는 시점은 상사인 알이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일을 맡기면서다. 그는 캐서린이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이 없어 매일 서관으로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유색인종이라는 표지판을 해머로 내리쳐 철거한다. 그녀는 알에게 '상사로서의 면모를 보여 달라'는 말 한 마디를 하고 그동안 들어갈 수 없었던 회의실에 입성한다. 냉정히 말해서 캐서린은 영화에서 단 한 번 징징대고, 계산한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되어 그녀는 신설된 우주 관련 부서에 일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인종 차별을 다룬 영화가 항상 무거울 필요는 없다고,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잘 풀어냈다고 평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문제를 가볍게 인식하는 것과 영화의 분위기가 가벼운 건 다른 문제다. 이 영화에서는 인종차별 극복 및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당시 여성들이 기울였던 노력보다는 그녀들의 타고난 재능이 강조됐다. 따라서 인종 차별 철폐라는 결과가 보통 사람의 투쟁이 아닌 소수의 특출함에 따라 도출된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그들이 백인과 동일 선상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들이 요구해서라기보다는 소수의 깨어 있는 상사가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매끄럽게 일이 진행되고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 찝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에 잠깐 묘사된, 피켓 시위를 하는 흑인들의 지난한 투쟁 덕분에 차별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었다. 물론 시위와 운동을 모든 문제를 푸는 만능 열쇠로 여기는 관점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를 과도하게 축소하면 어렵게 달성된 일이 쉽게 이뤄진 것처럼 왜곡되는 결과를 맞는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말은 이 영화의 단점을 정당화할 수 없다. 실화라도 감독과 각본가가 어떻게 매만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스토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흑인 여성이 NASA에서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자칫 그녀들 같은 특출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철폐할 수 있었다는 결론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특출함 자체로는 벽을 깰 수 없다. 백인들은 벽이 벽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벽의 존재를 부단히 증명해야 하고 돌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인종에 대한 공고한 차별을 부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와 인권의 도시에서 학대받고 멍들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