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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샤나 Apr 30. 2020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 그건 환상이야

<시리어스 맨>과 <환상의 그대>


세상이 네 마음대로 되면 그건 세상이 아니라 환상이야.


전민식의 소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속 이 한 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였다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주인공은 다시 '삶의 정상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주인공에게 둘째 형은 일침을 놓는다. 나는 이 뾰족한 말에서 작가의 관점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작가가 보기엔 삶에 정상궤도 따윈 없다. 인생은 자신의 뜻대로 설계할 수 없다. 설계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오만한 착각일 뿐. 금융상품 투자는 계획이 유효할 지 몰라도 인생은 그렇지 않다.


소설가 양귀자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모순>에서 그는 인생은 곧 고통이라고 규정했다. 그 말은 더 맞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 같다. 재산을 얼마나 잃었고, 소중한 사람 몇 명이 곁을 떠났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니다. 상실이 벼락처럼 찾아오기 때문에 고통이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와 <모순>은 '외재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외재론이란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외부의 변수에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내재론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다. 듣기에 내재론이 더 좋아 보이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외재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래서 외재론을 세련되게 풀어낸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영화감독 중 대표적 외재론자를 꼽자면 코엔 형제와 우디 앨런이 아닐까. 치열하게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으로 비난보다는 인정을 많이 받았을 이 감독들도 자기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고 믿는다니. 두 감독 작품 중 내가 좋아하는 <시리어스 맨>과 <환상의 그대>을 소개하려 한다. 두 편의 영화는 온도가 차갑다. 주인공에게 이입하기보다는 거리를 둔다. 마치 “쟤네 진짜 웃긴다”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만담을 듣는 듯한 영화들이다.


인생은 수학이 아니다 - <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래리에게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연거푸 발생한다. 바람난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가달라고 한다. 점수를 올려달라며 수강생이 쥐어준 촌지는 처치곤란이다. 이 사실을 들키면 종신 교수 임용은 물건너간다. 하지만 이혼 소송 때문에 변호사 선임비를 마련해야 한다. 음반 회사에서는 아들이 구입한 음반 값을 지불하라는 전화를 줄기차게 걸어온다. 사냥을 좋아하는 이웃집 남자는 유대인인 자신을 혐오하는 것만 같다. 집에 얹혀 사는 동생은 딸과 트러블을 일으킨다. 문제들은 종반부로 가면서 조금씩 해결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을 아무 것도 아닌 걱정거리로 만드는, 아주 큰 문제가 래리를 덮쳐 오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다른 설정도 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겠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래리가 수학 교수라는 것이다. 수학은 문제와 답이 분명한 학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래리의 삶을 설명하는 지표가 된다. 그의 인생은 수학같지 않다. 풀어도 풀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문제를 쥐똥처럼 보이게 만드는 더 큰 문제가 오늘 찾아올 수 있다.


특히 영화를 본 지 오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성인식을 마친 래리의 아들에게 랍비가 한 "좋은 사람이 되어라(Be a good boy)"는 말이다. 신의 뜻과 삶의 이치를 깨우친 듯 경건한 분위기를 풍기는 랍비는 소년에게 어떤 계시도 주지 않는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가면 옳다는 조언도 없이 그저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종교상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된 성인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 간결하다. 그러나 랍비는 어떤 선택과 태도를 견지하더라도 흔들릴 수 있는 게 삶이란 걸 알았기에, 그저 그런 말밖에 건넬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일도 사랑도 빙글빙글 - <환상의 그대>

<환상의 그대> 속 등장인물은 많지만 제일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했던 사람은 로이였다. 소설가 등단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로이는 어느 날 혼수상태인 친구의 집에서 흥미로운 원고를 발견하고, 친구 몰래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속여 출판사에 낸다. 로이는 주변에서 찬사를 받게 되지만 죽을 줄 알았던 친구의 상태가 호전되자 불안에 시달린다. 또 로이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아파트 창문 너머 빨간 옷을 입은 여인에게 마음이 빼앗긴다. 그 여인이 사는 방으로 건너가 사랑을 나눴는데, 이번에는 여인의 방에서 본 자신의 아내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밀리언 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이루어지고, 한 사람을 인생의 동반자 삼아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간다면 좋겠지만 그건 환상에 가깝다. 가지지 않은 것만 탐내는 등 내 마음부터가 미꾸라지처럼 잡히지 않는데, 삶인들 예상대로 흘러갈 리 없다는 걸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고통은 벼락처럼 찾아오고 행운인 줄 알았던 기회는 뒤집혀 목을 죈다. 때론 신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삶은 무질서하게 흘러간다.  다만 이 영화들이 '노력해도 쓸모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단지 어떤 절망이나 희망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면 잘못되더라도 큰 낙심은 하지 않고, 일이 술술 잘 풀려서 붕 뜰 때도 가라앉게 해 줄 수 있다.


외재론은 나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다. 노력이 하등 쓸모없고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답답해진다. 그럴 때마다 외재론적 영화는 내 기운을 북돋는다. 나처럼 우왕좌왕하는 캐릭터를 보면 안심이 된다. 또 캐릭터가 상황이 전복되는 모양을 보면서 순간의 슬픔이나 기쁨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잠식하던 슬픔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직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코엔 형제와 우디 앨런의 영화를 계속 붙잡고 보고 또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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