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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샤나 Sep 26. 2017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내게 놓인 모든 것이 버거울 때 보는 영화 <매그놀리아>

제목은 베스트셀러 책에서 따왔지만 미리 책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이야기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언젠가부터 눈물이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빈도가 높아졌다. 중학생 때 <안녕, 형아>라는 매우 슬픈 영화를 보러 갔었다. 친구들은 옆에서 펑펑 우는데 나만 눈물이 안 나서 머쓱했었다. 누군가 죽음을 숨기고, 고통스러워하고, 결국 죽는 장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던 때였다. 성인이 되고 점점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내가 겪은 만큼 남의 고통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인지 슬픈 영화는 물론이고 울라고 만든 게 아닌 장르의 영화(?)에도 눈물을 쏟곤 했다. <비긴 어게인>에서 그레타가 공연할 때 울고, <겨울왕국>에서 안나가 어릴 적 방문을 열지 않는 엘사에게 말 거는 장면에서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그 장면에서 울컥하고 치밀어올랐다.


그 중 단연 최고의 최루 영화를 꼽자면 <매그놀리아>다. 아홉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복잡한 영화다. 각자가 처한 상황을 보면 숨이 꽉 막힌다. 예를 들어 얼은 유명 퀴즈쇼의 프로듀서였지만 이제는 은퇴하고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지만 쉼없이 바람을 피웠고, 아내가 죽었을 때도 한 번을 찾아가지 않았다. 홀로 남아 간호를 해야 했던 아들 프랭크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으로 이름도 바꾸고 과거를 감추며 살아간다. 얼은 죽을 때가 되니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깊은 회한이 밀려든다. 프랭크가 생각난다. 어떻게든 유일한 아들을 찾고 싶다.


또 한 명 있다. 클라우디아는 유명한 퀴즈쇼 사회자인 지미의 딸이다. 대중에게 따뜻한 이미지로 알려진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다. 클라우디아는 어른이 되어 결국 집을 나온다. 상처투성이인 유년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그녀는 마약에 찌들어 지낸다.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관계를 시작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매그놀리아의 등장인물 클라우디아(멜로라 월터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짓고, 후회하거나 원망하고, 진심을 털어놓거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아홉 인물의 감정이 이룬 덩굴이 영화 내내 얼키설키 얽힌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볼 때마다 감정이입하게 되는 인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홉 명 중 누구도 부차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공들여 설계됐다. 단순 재미를 위해 설계된 갈등도 없다. 클라우디아의 입장이 와닿을 때도 있고, 스탠리가 울 때 나도 같이 따라 울기도 했다. 곤경에 처한 인물들이 나와 닮았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울고 나도 나를 둘러싼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후련했다. 이 글에는 <매그놀리아>를 볼 때마다 내가 기록해 놓은 것들을 담았다.


2016/2/17

새벽에 매그놀리아를 봤다. 어제 공부하면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복잡할 때 이 영화가 생각났다. 등장인물들은 누구 하나도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인물들이 워낙 많은 탓에 각자가 처한 곤경에 감정이입할 새에 다른 인물로 넘어가버린다. 그럼에도 아픔은 제각각 공감이 간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이입 상대는 좀 다른데, 오늘은 스탠리의 입장이 특히 이해가 됐다.


스탠리는 퀴즈쇼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하며 유명해졌지만 아직 아이일 뿐이다. 아버지는 유명세에 눈이 멀어 스탠리를 퀴즈쇼로 내몬다. 스탠리는 퀴즈를 척척 맞추다가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마는데, 그 누구도 괜찮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질문에 답을 하라고만 강요하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있다. 늘 질문을 받는 입장이었던 스탠리는 처음으로 퀴즈 진행자 지미에게 되물어본다. 왜 이러는 거냐고. 지미는 모르겠다는 답을 남긴다. 스탠리는 감옥 같았을 퀴즈쇼 스튜디오를 뛰쳐나간다. 늘 그를 몰아세우는 아버지가 있는 집도 불편하기에 스탠리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는다. 밤을 새고 집으로 돌아온 스탠리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저에게 잘 대해 주셔야 해요." 그 기운 없는 말이 마음 아프다.


예전에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린다는 조금 알 것 같으면서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얼을 사랑하지 않았다가 죽음에 가까워서야 사랑하게 됐다니. 생각해보면 얼과 린다의 행동은 유사하다. 얼은 아픈 아내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고 아들에게 간호를 떠맡겼다. 린다는 죽음에 임박한 얼을 간호사에게 맡기고 집을 비운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고 또 후회한다. 린다가 과거의 행동을 털어놓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르게 그 감정을 알 것도 같았다. 변호사가 린다에게 진정하라고 말하자 나 또한 속으로 그게 빛 좋은 개살구같은 위로로 느껴졌고 전혀 고맙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린다는 닥치라는 말을 하며 나가버린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허울뿐인 위로와 친절은 가끔 부아를 치밀게 한다.


린다가 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사과할 때, 클라우디아가 짐에게 자신은 이상한 사람이라며 고백하고 그와 키스할 때 그냥 눈물이 났다. 어찌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각각의 인물의 고통이 생생하고 사무친다. 마지막에 웃는 클라우디아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고통을 나눠 가질 사람을 만나 치유될 가능성을 남기고 영화가 끝난다. 다시 한 번 매그놀리아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됐다.


2017/1/13

글을 쓰는 건 17일이지만 또 매그놀리아를 봤다. 이번에도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다시 이 영화를 찾았다. 심장이 자꾸 뛴다.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그럴 때마다 내게 위로가 되어 줬다. 저번에는 스탠리였지만 이번엔 클라우디아의 입장에서 봤다. 클라우디아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혼자 치유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상처는 가족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짐과 데이트를 해보지만 시작할 자신이 없어 밀쳐낸다. 클라우디아가 짐이라는 사람을 알아가려는 찰나 레스토랑을 뛰쳐나가는 이유는 그녀가 누군가와 다시 유대감을 형성하고 관계를 맺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면 상처 받을까봐.


펑펑 울고 나면 기분이 후련하다. 클라우디아의 미소로 끝나는 엔딩도 희망적이다. 나는 이 영화가 절망과 희망을 배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절망하는 일들이 이어지다가 말미에 살짝 주어지는 희망은 사람이 절망을 딛고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나에게 매그놀리아는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 더 내려갈 곳도 없다고 느낄 때 살짝 더 내려가게 하는 영화다. 그건 도약을 위한 낙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묘한 기대감이 든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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