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퀴어 영화에서 ‘세간의 시선’은 영화의 비극을 더하는 요소다.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그렇다. 에니스가 잭과 사랑에 빠진 당시는 1960년대다. 에니스의 머릿속에는 커밍아웃 당하고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후 결국 죽음에 이른 한 남자의 잔상이 떠나지 않는다. 동성애를 불결하고 이상하게 보는 사회적 시선은 에니스와 잭의 사랑을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그런 ‘세간의 시선’이 놀랍도록 배제돼 있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에 대해 누구 하나 걸고 넘어지거나 따가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내게 에니스와 잭의 사랑만큼 안타깝고 여운이 짙었다. 한동안 엘리오와 올리버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갈 두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렸다.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은, 풍요롭고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도 관객을 슬프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원동력은 엘리오의 감정을 간접적,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데 총동원되는 편집 방식이다. 물론 엘리오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군데군데 생략돼 불친절하지만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 때문인지 난 왜 엘리오가 사랑에 빠졌는지 납득이 됐고 그의 감정에 대체로 공감하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짧아도 사랑
어떤 사랑은 사랑이라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짧은 순간 진행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받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나눈 한여름의 사랑은 그런 지탄을 받을 수 있다. 두 사람은 겨우 6주간 사랑을 틔웠고, 그것도 상당 기간은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혹자는 올리버가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에서 엘리오를 갖고 놀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긴 세월 지속된 것만큼, 지고지순한 사랑만큼 진하고 강렬하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은 6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싹트지만, 그 사랑의 파장은 컸다.
사랑한단 말 없이 사랑을 말하는 법
그 사랑의 강렬함은 주로 말이 아닌 행동과 눈빛으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통상적인 로맨스 영화와 비교해 없는 것 두 개를 꼽자면 나레이션과 ‘사랑한다’는 대사다. 영화는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표현한다. 평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연출 방식이기도 하고, 영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어떤 '사건'보다는 그 사건으로 인한 인물의 '심경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도 결국 사랑이란 어떤 뚜렷한 계기 없이 찾아오며, 사람이 더 좋아지는 데 ‘사건’이라 꼬집어 말할 수 있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서사보다 중요한 것은 인물의 감정, 어떤 일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의 파장이다. 플롯 위주의 현대소설을 비판하고 엘리오의 의식의 흐름을 적어나갔던 원작 소설 작가 안드레 아치먼과 맥을 같이 한다.
정교하고 섬세한 사운드트랙
나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도 참 좋았는데, 모든 곡들이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반영하고 있다. 음악은 말을 대체하는 사랑 표현 방식이다.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할렐루야 정션 1악장’(Hallelujah Junction - 1st Movement)은 곧 휘몰아칠 감정으로 마음이 뒤흔들리는, ‘일렁임’을 잘 표현했다.
또 영화 수록곡 중 하나인 F.R David의 ‘Words’ 가사도 비슷하다.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그건 이 사람이 눌변이라기보다는, 사랑한다, 아름답다, 함께 있고 싶다 등의 말이 상대에 대한 큰 마음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수프얀 스티븐스의 음악으로 내레이션을 대신했다고 한다. 엔딩을 장식하는 ‘Visions of Gideon’의 가사 중 ‘당신과 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상이었나요?’라는 구절은 모닥불을 바라보는 엘리오의 심정과 같다. 인물의 감정을 직설적 대사가 아닌 음악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관객은 엘리오의 표정, 올리버의 목소리 톤에 집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그들의 감정을 읽어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올리버를 위한 변
혹자는 올리버가 엘리오를 갖고 놀았다며 그를 질타한다. 올리버가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나는 올리버가 밉지 않다. 올리버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불운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누구든지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잘생긴 외모와 권태로운 분위기를 보면 그가 축복 받은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며 자라온 내면이 있다. 올리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과 기분을 보여주지 않고 숨기는 데 능한 사람이다. 엘리오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나서 그의 실제 성격이 드러나는데, 엘리오의 기분을 살피고 조심스러워하는 태도에서 자신만만하던 평소 모습과의 괴리를 느낄 수 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올리버는 평생 절제하며 살아왔다. 교수가 된다면 절제력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 첫 식사에서 엘리오의 어머니가 계란을 더 권하자 세 개를 먹으면 네 개를 먹고싶어질 거라는 걸 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한여름은 처음으로 절제가 아닌, 자신이 마음이 가는 방향대로 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기회는 올리버에게 이제 영영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 되어 올리버가 약혼을 알려온 것은 엘리오를 가지고 논 것이라기보다, 자신이 잠시나마 자유롭게 사랑했던 상대에게 고하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며, 이별의 표현이다.
엘리오가 안타깝고, 또 올리버가 안타깝기 때문에 엘리오가 다시 안타깝다. 엘리오에게 올리버라는 사랑은 각별한데, 그 사랑은 시간이 지나서라도 이뤄질 거라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리버의 괴로움은 결국 엘리오에게도 돌아오는 것이다. 한 번은 엘리오, 한 번은 올리버로 두 사람의 입장을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두 사람이 각자의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올리버가 가장 올리버다워지는 순간은 엘리오와 함께 있을 때 같았다. 그런 점에서 올리버가 자신의 이름을 엘리오에게 주는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야말로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다는 것, 그만큼 당신에겐 투명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고백과도 같다. 올리버는 엘리오가 처음에 무례하다고 느낄 만큼 여유가 넘치며, 아버지가 이야기한 학설에 바로 반박하는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런 올리버도 엘리오를 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 엘리오도 마찬가지다. 나의 부족함을 자꾸 상기시키는 상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대. 나보다 더 나은 너의 이름을 나를 부르는 행위로 올리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표현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올리버는 여름 그 순간 자아를 규정하는 이름을 엘리오에게 붙여줬을 정도로 엘리오를 사랑했던 것 같다.
올해 초 영화를 본 후의 느낌을 기록한 이 글을 오랫동안 발행하지 못했다. 글이 감정적인 것 같아서 좀 더 고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빠졌던 관객들도 대부분 엘리오나 올리버의 감정을 곱씹고 그들의 입장을 계속해서 생각했을 터다. 나도 그런 관객의 일부로서,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어찌 보면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우리는 인간이고, 그게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늘 그 본질에 집중하는 구아다니노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