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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샤나 Apr 15. 2020

소공녀가 아닌 반항의 아이콘

영화 <소공녀>

옆집이 새로 이사를 온 건 2월 말이었다. 그는 늦은 밤까지 통화했고, 날마다 새로운 친구를 초대해 집들이를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방음이 끔찍하리만치 안 되기 때문이었다. 크지 않은 대화소리마저도 고스란히 벽을 넘어 내 방에까지 전해졌다. 불쑥 들려오는 그 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건물주가 원래 한 집이었던 공간을 둘로 쪼개 쪽방을 만들면서 부실한 자재를 쓴 데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분노는 그런 집을 만든 건물주나 시공사가 아니라, 소음을 일으키는 이웃에게로 향했다. 참지 못하고 항의 쪽지를 붙였다. 건물주가 내건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규칙을 거론하며, 조용히 해달라는 뜻을 완곡히 전했다.


이사를 다니면서 곰팡이가 내 탓이라는 주인, 세를 올려주지 않으면 내보내겠다는 주인 등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다. 부실한 집도 많았고 그 책임을 기피하는 집주인들도 그만큼 많았다. 그게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꺼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취약한 방음에 대해 집주인에게 항의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집세가 꽤 저렴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이 가격에 이 정도 문제야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것 같다. 소음 문제로 괴로울 때 나의 생각과 달리 감정은 건물주가 아닌 애꿎은 이웃에게 향했다. 그가 밤늦게까지 수다를 떤 것은 맞지만, 개인적인 공간에서 친구를 초대하거나 통화를 하는 건 자유였다. 옆집을 향한 분노로 드러난 건 나의 순응적 태도였다. 김수영의 시처럼,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고 있었다.


이 분노의 쪽지 사태의 원인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내게 집이 중요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편히 쉴 공간은 내게 소중하기에 그 환경을 방해하는 요소를 견디기 힘들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집이란 필수재다. 의식주를 중요도에 따라 재배열한다면, '주식의'가 돼야 한다. 몸 누일 한 칸이 없다면, 생활은 불안정해질 뿐더러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도 있다. 삶이 한층 고달파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의 선택은 놀라웠다. 미소는 위스키와 담배를 즐긴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한다.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게 세는 병을 앓고 있다. 집세도 내야 한다.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버는 돈은 다섯 가지를 모두 충당하기엔 부족하다. 새해를 맞아 인상된 담배값, 집주인이 올린 월세 때문에 지출이 늘어나자 그가 가장 먼저 포기한 건 집이었다. 그래서 연락이 끊겼던 대학 시절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또 주머니 사정이 쪼그라들었을 때 그는 약을 포기한다. 위스키와 담배를 꿋꿋이 사수한다. 여러 모로 이 영화는 술과 담배를 권장하지 않는 공익광고와 정반대 길을 간다.

미소라는 판타지

이 영화를 만든 전고운 감독 인터뷰 기사에는 미소를 '비현실적', '판타지적'이라고 칭하는 질문자들이 많았다. 그만큼 미소라는 인물이 특이하고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겠다 싶었다. 그런데 대책 없어 보이는 미소의 선택은 우리가 순응하거나 묵과해 버렸던 세태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전 감독은 미소처럼 애연가이고, 가진 돈으로는 변변한 집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집세와 담뱃값이 당연하다는 듯 오르는 것에 부조리를 느꼈다. 미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의 형편없는 집에 애써 구겨 살거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다. 미소의 행동은 많은 이의 대척점에 있다. 반대편에 선 미소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물정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미소가 비현실적이다 못해 판타지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가 당당하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미소는 항상 품위를 지킨다. 미소는 친구들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하면서도, 굽신거리거나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대가로 제공할 수 있는 것(집안일, 계란 한 판)을 확실히 제시한다. 예컨대 으리으리한 대학 동창 집에 신세를 지면서, 동창의 남편과 스스럼없이 담배를 피려 한다. 미소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처럼 보였던 동창이 본심을 드러낸 지점도 여기였다. 자신에게는 아직 어려운 남편 앞에서, 미소가 어떻게 그토록 뻔뻔하고 당당할 수 있냐고 캐묻는다. 미소는 몰염치와 상식, 빌붙기와 당당함이 공존하는 모순 덩어리인 걸까.


 사실 빌붙기와 당당함은 모순 관계가 아니다. 미소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집을 잃은 게 아니라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한 행동에는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아마 미소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못나서 집이 없이 사는 게 아니라, 담뱃값과 집세가 오르는 세상에 맞서 집을 없앤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동창들에게도 어쩔 수 없이 빌붙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신세를 지는 것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미소는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 내가 집의 결함에 순응하고 엉뚱한 데 분노한 것과는 정반대다. 순응은 위험하다. 마땅히 비판해야 할 것을 비판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국 충분히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과 비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방음이 안 되는 저렴한 집을 얻은 건, 그만큼밖에 돈을 융통할 수 없는 내 탓이라 여기게 된다. 미소는 자신이 정말 가치 있게 여기는 게 따로 있기에 집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다. 동창들의 고민과 설움을 들어주며, 그들의 상황을 배려하는 이해심은 여기서 나온다.


미소처럼 살기, 가능할까

정녕 미소는 위스키와 담배만 있어도 행복할까. 음주와 흡연에서 오는 쾌락은 일시적인데, 미소는 어떻게 지속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그녀가 선택한 술과 담배는 휘발성이 높은 행복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소에게 이것은 단순한 기호 식품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안 되는 확고한 취향이다. 다른 어떤 담배나 술보다 최상급의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순간의 쾌락은, 미소가 매일 돈을 아껴 즐긴다면 영원한 쾌락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친구들은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 대저택, 결혼을 붙잡고 산다. 이것들은 대개 오래 지속된다는 점에서 휘발성이 낮은 행복이다. 그러나 미소가 방문한 친구들의 면면을 보면, 위스키와 담배만큼 위의 것들도 휘발성이 강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해가며 갈망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우리는 깨닫곤 한다. 미소가 추구하는 담배와 위스키는 비록 휘발성이 높지만, '현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미소는 집을 포기한 덕분에, 오늘의 위스키를 내일로 미룰 필요가 없다.


미소라는 캐릭터가 주는 의미를 생각하면서도, 내내 잊히지 않았던 의문은 미소처럼 사는 게 정말 가능한가였다. 쉽지 않을 것이다. 삶은 내게 소소한 행복을 주는 몇몇 개로만 영위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큰 불행 하나만으로 행복은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 어젯밤 나를 즐겁게 해줬던 위스키가 해고 통보를 받은 날에도 똑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행복해지려는 노력만큼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이 없어서 겪게 되는 상황은, 특히 미소 같은 여성에게는 생명의 위협까지 초래할 수 있는 불행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았다. 집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행은 위스키 한 잔의 행복보다 훨씬 크다. 그런 점에서 미소의 선택을 상징적인 장치라고 납득하려 하다가도, 뭔가 세상의 이치를 하나 빼먹은 듯한 느낌이 들어 개운치 않았다. 내가 때묻은 건가 싶어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봤지만, 난 여전히 미소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미소라는 판타지는 우리에게 반항심을 꿈틀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비싼 집세를 낼 능력이 없는 자신에게 책임을 얹는 대신 기형적으로 비싼 집값을 탓하는 것. 자본에 밀려날 때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하며 순응하지 않고 항의라도 해보는 것. 그런 반항심을 잃은 지 오래인 내게, 이 영화는 묘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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