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자신의 입장에서 극을 이끌어나가는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장이 설득되지 않는 것이다. 사라 폴리 감독의 <우리도 사랑일까>가 그랬다. 주인공 마고는 왜 남편이 일 때문에 통화하는데 입안에 손을 넣고 괴롭히는가. 왜 처음 본 남자와 입김 불기 게임을 하는가. 도대체 왜 듬직한 남편을 두고 옆집 총각과 바람이 났을까.
곱씹어 보면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행동은 '미숙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헌 사랑이 싫증나 새 사랑으로. 다시 공허함을 느끼고 마는. 이 말을 쓰다보니 다니엘이 마고에게 보여줬던 그림이 이해가 갔다. 밝은 빨간색으로 드러나는 마고의 겉모습과 회색의 진정한 본모습.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공이 러닝타임 내내 나오니 다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느 날 무심결에 재생을 눌렀는데 한 번도 정지하지 않고 계속 보게 되었다. 다시 보니 세심한 연출이 돋보였다. 등장인물들이 입은 옷의 색깔부터 직업, 첫장면과 같은 장면을 마지막에 배치하는 것, 루와 마고가 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 다니엘과 마고가 사랑을 나눌 때 집안의 가구배치가 계속 바뀌는 것 등 꼼꼼한 설정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마고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이해하기 싫었던 그녀의 감정에 처음으로 공감이 갔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다니엘의 집에서 마고가 사촌 토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토니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됐을 때, 아기를 봐주다 보면 가끔 울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이유가 뭔지 정말 열심히 고민했어요. 피곤해서, 배가 고파서, 열이 있어서 등등 대부분 그 이유는 쉽게 찾아낼 수 있었죠. 있잖아요, 가끔 길을 걸을 때 보도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떨어지면 그냥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어른이니까 순간적인 감상에 빠져서 울면 안된다고 마음 먹어요. 내 생각에 토니도 가끔 그랬던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되는지 영문도 모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그런 상태요. 살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태.
마고는 고백하고 있다. 원인과 소재가 명확하지 않은, 가끔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올라오는 그런 감정이 있다고. 나도 겪어본 적 있다. 혼자 집에 있을 때, 밥을 먹을 때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 봐도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내 자신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마고가 느릿느릿 자신은 그랬노라 하며 다니엘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내버려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백만가지도 넘는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어떻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으랴. 하물며 내 자신도 잘 모를 때가 있는데. 그래서 그 뒤로 영화 상에서 마고가 하는 행동이 꼭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나라면 저렇게 안 할 텐데'라는 느낌이 들어도, 마고는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마고가 수영장에서 마주친 노인들은 "모든 새 것은 헌 것이 된다오"라고 말한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헌 것은 원래 새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마고가 루를 떠난 이유는 루가 부족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루와의 생활은 안락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다니엘이 마고를 볼 때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난다. 마고에게 다니엘은 새로운 사람이고, 다니엘 역시 마고가 새롭다. 마고는 다니엘의 빛나는 눈빛을 보며 자신이 새 것처럼 빛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형체 없는 목소리보다 영상이 마음이 빼앗기기 쉬운 매체인 것처럼. 비디오는 라디오 스타를 내쫓는다.
그러나 제럴딘이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구멍을 일일히 메우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헌 사랑이 지겨워 매번 새 사랑을 찾아다니려면 안정과 정착은 포기해야 한다. 반짝이던 상대를 향한 콩깍지가 하나씩 벗겨지고, 소중함이 무심함이 되면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고는 마지막에 다니엘과 탔던 놀이기구를 혼자 타러 온다. 이제는 늘 곁에 있어줄 반짝거리는 사랑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공허함을 견뎌야 하는 사람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