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리시맨>을 보고
*이 글에는 영화 <아이리시맨>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한때 내겐 '꼭 극장에서 봐야 해' 리스트가 있었다. 영상미가 있거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음악이 일품이라고 소문난 영화들이 포함됐다. 그런 영화들은 아껴두고 언제 할 지 모를 재개봉을 기다렸다. OTT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노트북으로 보는 영화가 익숙해졌고, 반드시 극장이어야 한다는 고집은 무의미해졌다.
그런데 얼마 전 넷플릭스가 배급한 <아이리시맨>을 본 뒤, 극장에서 봤어야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멈춰가며 봐서는 안 된다던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난 그 말을 듣지 않고 자주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에 확 몰입했을 땐 초반부를 더 세심하게 볼 걸 후회했다. 한편으론 궁금했다. 관객 대다수가 언제든 감상을 잠깐 혹은 영영 멈출 수 있는 게 넷플릭스 영화인데, 왜 멈추면 안 되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봤다.
1. 왜 3시간이 넘는 영화여야 했나
사실 러닝타임이 긴 영화는 아무리 명작이라 해도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보기로 결심했어도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구성이 아니라는 점이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게 만든다. 이 영화는 시간의 층위가 세 개다. 1950년대 처음 만나 점점 가까워지는 러셀과 프랭크 - 1975년 수금과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동하는 러셀과 프랭크 - 2000년대 초반 양로원에 있는 프랭크를 다룬다. 양로원에서 시작했다가 1975년으로 가기도 하고, 1975년에서 50년대로 옮겨갔다가 다시 양로원의 프랭크가 나오기도 한다. 영화에서 다루는 시대가 복수인데다 시대별 사건도 많다 보니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보다 보면 195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결국 1975년 그 날과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영화를 200분까지 늘려놓은 주범은 '구강액션'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보통 갱스터 영화들과 달리 액션이 화려하지도 않고, 사건을 전개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영화는 프랭크가 사람을 죽이는 순간을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에게 살인 명령과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 마피아들의 '전언'에 상당 부분 할애한다. 액션을 기대했다면 재미없어 멈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수다스러움이 영화의 묘미인 것 같다. 경쾌한 폭발 테러가 지지부진하고 논리라곤 없는 의사결정 과정을 거친 결과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수다는 마피아가 일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행동을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해 바꾸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은 자네를 매우 걱정하고 있어"라고 말한다든가 하는 대사들이 좋았다(사실 걱정하는 건 자신이다). 중대한 일을 처리하러 가는 차안에서 느닷없이 두 인물이 생선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무슨 생선인지도 모르고 친구가 주문해둔 생선을 실었다는 극중 인물의 말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여왔고 죽이러 가는 프랭크의 행동과도 맞닿아 있다. 그 점을 나레이션으로 꼬집기보다, 자칫 의미 없어 보이는 생선 대화로 표현한 셈이다.
2. 왜 갓 등장한 인물의 죽음을 알려주는가
영화는 독특하게도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설명을 단다. 웃고 있는 인물 바로 옆에 '얼굴에 총을 네 번 맞고 사망'이 뜬다는 게 꽤 웃기지만 김이 새기도 한다. 물론 핵심 인물들에게는 이 자막이 나오지 않으며, 그 인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에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영화 전반에서 죽음은 허무하고 평등하다. 그 누구의 죽음도 결정적 사건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비열한 거리>나 <좋은 친구들> 등 작품에서 일관되게 폭력의 허무함을 말하면서도 갱스터 영화라는 장르적 재미도 잡고자 했다. 그래서 액션에 공을 들이다 보니 마피아를 미화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 영화는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표현하는 식으로 그 한계를 벗어난다. 프랭크가 죽인 사람들은 모두 총에 맞자마자 소리 없이 쓰러진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죽이는 사람이 멋있어 보일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 멋있어 보이려고 했으면 드 니로가 아닌 디카프리오를 캐스팅했을지도 모른다. 디에이징 작업을 거쳤어도 프랭크 역을 맡은 로버트 드 니로는 배가 나왔고, 손짓이나 걸음은 영락 없는 노인이다. 영화는 프랭크의 멋있는 한때보다 노인이 된 초라한 프랭크의 회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드 니로를 캐스팅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영화에서 프랭크 다음으로 비중이 큰 지미 호파도 다른 사망자들처럼 죽음이 꽤나 볼품없게 묘사됐다. 이 점에서 영화는 특정 인물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는다. 마피아, 노조, 그 사이에 선 누군가도 절대 미화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죽음을 그리는 방식에 내재돼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프랭크의 총에 맞고 조용히 엎드려 있는 지미를 몇 초간 비춘다. 알 파치노가 맡은 역할 중 저렇게 고요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는 캐릭터가 있었을까. 그가 엎드려 있는 장면을 찍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깐 상상했다.
3. 왜 아이리시맨인가
마지막 질문은 왜 영화의 주인공이 아이리시맨, 즉 프랭크인가다. 이탈리아계 마피아인 러셀이나 노조위원장 지미 쪽이 훨씬 개성도 강하고 소위 말하는 영화 주인공 같다. 반대로 프랭크는 묵묵히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각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전언-명령-살인이 반복돼 지루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러셀과 지미라는 두 인물을 통해 프랭크의 결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극중 러셀은 "모든 길은 러셀에게로 통한다"고 표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는 사람이며 만사를 은밀하고 능숙하게 처리한다. 그에게는 차 안에서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지미는 쇼맨십이 넘친다. 그는 노조를 거대한 조직으로 키워냈다. 지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함께 있는 사람들도 못 마시게 한다. 어찌 보면 술과 담배는 각각 러셀과 지미에게 타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신념이든 가치관이든 어떤 이유로 내세운 비타협 지점은 그 사람의 독특한 캐릭터가 된다. 이에 비해 프랭크는 뚜렷한 신념이랄 게 없다. 명령에 토달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프랭크는 러셀이나 지미의 더없이 훌륭한 수하가 된다. 심지어 프랭크는 절친했던 지미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상황도 거부하지 않는다.
프랭크는 러셀을 존중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했으며, 지미를 언제까지나 보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러셀과 지미에 대해 그의 존경심은 신념이 아닌 두려움에서 온 게 아닐까. 누군가를 살해하며 그에게는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상존했을 터다. 두려움이 존경이 될 수도 있다는 그의 착각은 가족과의 관계까지 망쳐놓는다. 예컨대 딸 페기를 밀쳤다는 이유로 식료품점 주인의 손을 밟아 보복하는 것도 나름 가족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페기는 평생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됐다. 프랭크는 직접 벌인 살인이 뉴스에 나왔을 때 페기의 두려운 눈빛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낀다. 늙어버린 프랭크는 딸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호소한다. 이에 딸은 힘들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끔찍한 일을 저지를까봐 털어놓을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신념 없이 두려움으로 살아남은 자에게는 유대도 명예도 없다는 점은, 프랭크가 주인공이기에 알 수 있다.
잭 니콜슨 주연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 슈미트는 수많은 세월을 함께한 가족과의 유대가 한없이 빈약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황혼의 문턱에서 유대감의 부재를 느낀다는 점에서 프랭크와 유사한 캐릭터다. 다만 슈미트는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속얘기를 담아 편지를 쓸 탄자니아 소년도 있다. 프랭크에게는 그 어느 것도 없다. 그는 이제 알려져봐야 별 반향도 없을, 자신이 섬기던 세계의 비밀을 꼭꼭 숨기면서도 세상에서 잊혀지고 고립되고 싶지 않아 한다. 영화 말미에 그가 신부에게 하는 문을 닫지 말아달라는 부탁은 그래서 초라하다.
긴 러닝타임과 스포일러 자막, 별 볼일 없는 주인공이라는 점은 이 영화를 보다 멈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보면, 이들을 통해 스코세이지 감독이 어떤 것을 표현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이제 더 이상 극장에서 볼 수는 없지만 노트북이나 컴퓨터로라도, 멈추지 않고 아이리시맨을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