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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Jun 04. 2019

<영 아메드>, 다르덴 형제의 가장 따뜻한 시선

미개봉작 <영 아메드> 리뷰

*기본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감상평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꼽아야 할 때 꽤 난감함을 느끼는 편인데 - 꼭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걸까, 두루두루 좋은데! - 그럼에도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였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이 영화를 DVD로 처음 보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의 전율과 여운이 너무나 강한 영화였고, 이후 긴 간격을 두고 몇 번 더 영화를 보아도 매번 그 힘을 느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보여주는 그 시선이 좋다.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 -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일상에 존재하는 자들 - , 사회의 약자를 한결같이 다루며, (이젠 다르덴 형제의 전유물이 아닌)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로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질기게 뒤를 쫓는다. 카메라와 그들간의 거리를 관객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들에게 바짝 밀착하여 감정이입을 하는 대신 화면 바깥에서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하게 된다. 내게 다르덴 형제 영화의 마법 같은 순간은 영화가 끝난 다음이다. 영화 속 이들의 삶이 그렇게 계속될 것임을 알게 되고, 화면이 어두워지고 나면, 주인공을 향한 감정이 그때 휘몰아친다. 그리고는 우리 사회에 실제로 있는 그들과 그들을 둘러싼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다르덴 형제는 우리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의 힘을 가장 담담하지만 강력하게 발휘해내는 감독이 아닐까. 



다르덴 형제의 신작 <영 아메드>(프랑스어 제목 Le jeune Ahmed)가 72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베일을 벗음과 동시에 프랑스에 개봉했다. 이번 작품에서 다르덴 형제가 주목한 사회 이슈는 이슬람극단주의와 테러리즘이다. 


벨기에에 사는 13살 소년 아메드는 이슬람교도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그가 믿고 따르는 이맘(이슬람 모스크의 지도자)은 아직 어린 아메드를 극단주의의 길로 빠지게 하려 한다. 아메드는 이슬람극단주의로 '순교'한 자신의 사촌형을 기리며 때마다 철저히 기도하고, 자신 또한 언젠가는 사촌형을 따라 성전에 몸을 바치기를 바란다. 한편, 이맘은 방과후 숙제를 도와주는 학교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여 선생을, 모스크에 해를 끼치는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고, 아메드는 '순수하게도' 진짜 그녀를 처단하러 갔다가 실패한다. 이 사건으로 소년원에 머무르게 된 아메드는 외부 농장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농장 주인의 딸아이를 만나고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 소녀를 향한 마음, '처단'이라는 소명을 받들어야 하는 그의 맹신,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소년 아메드의 마음에 뒤섞인다. 


아메드는 웃지 않는다. 웃지 않을 뿐더러 화내지도 않는다.(소녀를 밀치며 화를 내는 순간이 한 번 있지만 이때는 아메드의 내적갈등이 극에 다다른 순간이라 표출했어야만 한다.) 감정적 동요가 없는 소년.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의 무뚝뚝함과 시큰둥함이라기엔 그 일관된 고요함으로 '살인 시도'를 해버리니, 그의 웃음기 없는 얼굴 뒤에 그럴 만한 이야기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엄마가 동네 이맘을 따르는 자신을 걱정하자 아랍어로 엄마의 음주를 비난하고, 농장 주인들이 자신들에게 너무 친절하게 굴어서 싫다는 아메드. 그러나 이전에 그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 영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취약함을 지닌 소년이 어떻게 이슬람극단주의의 희생양이 되는지, 아이의 연약한 마음과 순수함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예의 핸드헬드와 롱테이크가 힘을 발하며.


하지만 이번 영화의 시선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인물과 거리를 두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아메드의 순수한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소재가 워낙 가치의 옳음과 그름이 분명한 소재라서일까, 아이가 주인공이라 그럴까, 그가 제발 마음을 바꾸게 되기를 일찍이 바라게 된다. 진짜 벨기에 어딘가에서 만날 것 같은 흔한 소년 아메드가 줄곧 아래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볼 때, 소녀의 방문 앞으로 가서 인사를 할 때 얼굴에 한가득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은 나만의 감상이 아닐 것이다. 소년에게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소녀를 등장시키고, 그런 소녀가 풀을 꺾어다 아메드 얼굴을 간지럽히며 웃음을 터지게 하며, 다르덴 형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따스'하고 인간적인 정서를 품게끔 만든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아메드가 감정을 터뜨리는 순간, 다르덴 형제가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감정은 더욱 선명하다. 


영화 관련 모든 사진 출처: diaphana distribution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의 느낌이 전작들과 사뭇 달랐다. 너무 명징한 메시지를 남기는 아메드의 마지막 대사가, 영화 속 인물에게 앞으로 벌어질 현실을 관객 스스로 곱씹게 만들기보다는 다 씹어 보여준 느낌이랄까. 그래서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만듦새가 전작에 비해 남다르다 할 부분도 특별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들을 한결같이 발견해내는 그들의 집요한 통찰력, 그것을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게 일상의 톤으로 그려내는 섬세한 관찰력은 여전히 너무나 매력적이다. 너무 따뜻하고 분명했던 (그래서 오히려 낯설었던) 영화의 시선은 극단주의와 테러라는 주제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일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독님들이 어느새 60대 후반인데 나이가 들수록 날을 세우기보다 둥글어지는 세상 섭리인가 싶기도. 소녀와 소년이 서로 설렘을 느끼는 연기를 하는 동안 나도 엄마 미소를 짓게 되는데, 카메라 뒤에서 감독들이 할아버지 미소를 짓고 있을 상상이 되니 말이다.


한편, 영화 속 이야기와 조금 별개가 될 수 있지만 - 혹은 이 또한 영화를 통해 이야기될 법한 지점이다 -

아메드가 종교를 이유로 소녀와 뽀뽀를 해서는 안 되고 소녀가 이슬람으로 개종해 결혼을 약속하지 않는 이상 교제를 할 수 없는 진지한 상황 앞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데 이 장면이 사실은 웃을 일인가, 하는 점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 갈등 상황은 인물에게 있어 중요하고 장치로서도 관객들의 감정을 한편으로 해제시키는 부분이지만, 웃게끔 만들어진 이 상황이 현실 속 신자에게는 실제로 벌어질 일이고 그들에겐 웃음이 날 일이 아닐 것이다. 극단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다양한 종교를 존중하는 사회를 영화는 담고 있지만, 영화도 우리도 어쩌면 여전히 완전한 포용, 완전한 인정을 하지 못한 채 이해하고 있다는 제스쳐를 내보이고 있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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