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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an 15. 2020

미국의 아름다운 길, 유타 12번 도로(2)

브라이스 국립공원 가는 길

겨울 날씨가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고장,

겨울에도 노지에서 채소를 수확할 수 있는 고장이 바로 캘리포니아다. 물론 그렇다고 겨울에 춥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기후에 적응하면 섭씨 영상 10도에도 춥다. 한겨울엔 10도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는데, 이런 때는 두툼하고 따뜻한 롱 패딩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올해는 겨울에 들어서자 사나흘 동안 겨울폭풍이 불어, 저지대에는 많은 비를 뿌렸고 고지대엔 폭설이 내렸다. 이번 태풍은 비단 캘리포니아만 아니라 미서부지역에 골고루 영향을 미처 평소엔 눈이 많지 않던 곳들에도 많은 눈이 내려 주변을 온통 눈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번 이야기는 이런 겨울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날 출발하여 하얀 겨울 왕국에서 헤매다 폭풍이 끝날 무렵 돌아온 여행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라스베이거스를 지날 때만 해도 세차게 내리던 비는

유타에 접어들면서 진눈깨비로 바뀌는가 싶더니 어느 틈 엔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비가 눈으로 바뀌자 한편으로는 새하얀 설국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눈길이 걱정됐다.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에 사는 것은 눈이 주는 불편함이 없으니 좋은 점이기는 하지만, 눈을 보려면 적어도 서너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근방은 1962년 이래로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이번 겨울 폭풍의 영향으로 로스앤젤레스 근방에도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런 역사의 순간을 뒤로하고 유타에서 맞는 눈을 기대와 염려로 맞는 까닭이다. 

가는 길 고속도로에서 맞은 눈발


깜깜한 밤이라서 주변 상황이 잘 파악되질 않는다.

아지트가 있는 세다 시(Cedar City)에 접어들면서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길은 이미 제설작업을 했는지 아스팔트가 드러나 있었고, 눈은 이미 그쳤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눈이 쌓였는데도 아지트로 가는 길이 막혔다.


"어?"

"아지트로 못 가면 어디서 자나???"


지난여름에 묵었던 아지트 캠핑 스폿

이 주변에 있는 디스퍼스드 캠핑 스폿(Dispersed Camping Spot)은 대체로 아지트를 지나야 있기 때문이다. 길이 막혔으니 일단 차를 세우고 길 옆에 난 널찍한 빈터에 자릴 잡았다. 달리 방법이 없어 이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모양이다. 이번 여행은 텐트를 치지 않고 차 안에서 잘 생각으로 짐을 정리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길이 막혔으니 이 길을 통해 다음 목적지로 가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그러나 새벽녘에 도착해서 우선 잠이 급하니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아침은 처음이야!

차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였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이 추운지 창문에 성애가 방울방울 맺혀  닦아내고 밖을 살폈다.


"와~!"

"눈이다!"


얼마나 내렸는지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다.


텐트에서 일어나 문을 열면 텐트 밖이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을 보는 것이 그동안 여행하면서 꿔본 꿈이었는데, 이것을 차 안에서 이루게 되었다. 이럴 때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쓰면 맞나? 


얼른 눈곱을 떼고 차 문을 열어 창밖 세상을 끌어들여 사진에 담았다. 산과 들, 나무와 풀들, 이제 막 옷을 벗고 겨우살이에 든 온갖 것들 위에 고즈넉이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흐르는 냇물엔 차마 머물지 못하고, 그와 더불어 사는 작은 조약돌과 깊숙이 뿌리내린 바위, 어쩌다 냇가에 떨어져 휘영청 자리 잡은 나뭇가지들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눈을 들어 냇가 둑 너머 들판과 야트막한 산 밑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집들도 그동안 봐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눈 쌓인 벌판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자, 이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목적지는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이니 가는 길은 정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은 경로는 없는지 한번 살펴볼 요량으로 아침도 해결할 겸 세다 시의 한 패스트푸드점에 들려 지도를 살폈다.


브라이스 가는 길

세다 시에서 브라이스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국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어젯밤 내린 눈 때문에 국도는 막힌 곳이 여럿일 것이고, 그래서 안전하게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별 재미는 없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게 됐다.  

세다(Cedar) 시내 풍경


아침에 내리던 눈은 차츰 뜸해지더니 구름만 남기고 멈췄다. 가는 동안 걱정은 덜었지만, 눈이 그치니 혹시 브라이스에 눈이 적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안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지난밤 내린 눈으로 산이며 들은 이미 하얀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끔씩 지나는 차들은 마치 눈 구경하듯 속도를 늦추고 거북이걸음이다. 그런데 지난밤 곳에 따라 눈 내린 양이 달랐는지 브라이스 국립공원에 가까워질수록 쌓인 눈이 적어지더니, 이윽고 공원이 있는 12번 도로에 접어들면서는 드문드문 잔설만 남았다. 브라이스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레드락 캐니언(Red Rock Canyon) 역시나 눈은 내리지를 않았다.


"....."

"뭐 어쩌겠는가?"


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더구나 산 위엔 그래도 많은 눈이 있어 붉은 바위 산을 빛내고 있으면 됐지 싶었다. 눈이 없을 때는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또 눈이 적으면 적은 대로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연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늘에 구름이 많은 걸 보니 산 위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엔 눈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드 락 캐니언 즈음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공원으로 가는 12번 도로 양 옆의 숲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눈이 겨울을 알리고 있고, 살짝 낀 안개와 잔뜩 흐린 하늘은 을씨년스럽다기보다는 눈에 대한 기대 때문에 도리어 즐겁다. 길섶 풍경 살피랴 하늘 살피랴 노량으로 가다 보니 어느새 나폴나폴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브라이스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짙어져 공원 입구에 다다를 무렵엔 함박눈으로 바뀌어 온 하늘을 덮었다. 눈 덮인 브라이스의 모습을 볼 생각에 조금씩 속도를 올려보지만, 눈길은 허락하지 않는다. 

브라이스 국립공원에 가까워질수록 눈의 양은 늘어났다.


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눈이 제법 많이 쌓인 것을 보니 공원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린 모양이다. 어쩐 일인지 공원 요금소와 방문자 안내소는 문을 열지 않았다. 방문자 안내소 앞 주차장에 들르니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안내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거나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공원에 도착하고 나서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소복소복 추억도 쌓인다.

함박눈에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사진을 찍으려니 바람에 날린 눈송이들이 렌즈를 가로막아 얼른 몇 장 찍고 거둬들였다. 아침에 세다에서 만난 눈 보다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거세게 내리던지 '폭설' 수준이다. 그동안 이 정도의 눈을 맞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눈이 내렸다. 


오늘처럼 큰 눈이 내릴 때는 공원 트레일이나 뷰 포인트들을 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공원에 안내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어디 알아볼 만한 곳도 없기 때문에 그냥 둘러보다가 막혔으면 돌아 나오는 수밖에 없다. 

공원 안은 이미 설국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천천히 가다 보니 눈 쌓인 공원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멋있어 보이는 상록수와 나뭇잎과 가지에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들이 대비를 이뤄 절경이다.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 사진 한 장 찍고 가려고 갓길에 차를 세우려는데,


"앗 차-차-차-차~!"


차가 그만 눈에 미끄러져 길 아래로 비껴 나고 말았다. 

얼른 사륜으로 바꾸고 이리저리 해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눈 때문에 보이지 않았는데 갓길이 없는 턱이 진 길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씨름하고 있는데, 지나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어 도와주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자기가 운전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며 도와주려 한다. 여러 사람이 붙어 뒤에서 밀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한 차는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마침 준비해 가지고 다니던 탈출용 보드(Traction Boards)를 이용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럿이 밀어보지만, 어림도 없다.


지난 화이트 포켓* 여행에서는 모래에 빠져 거금을 날렸는데, 이번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상황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 선뜻 나섰던 그 모든 여행객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들 중 누군가가 공원 안전요원에게 연락을 했는지 빠져나오고 얼마 안 있어 구출에 나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조심 운전할 것을 신신당부하며 총총 사라졌다.




*화이트 포켓(White Pocket)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 




>>> 이어지는 글은 폭설이 내린 브라이스 국립공원의 설경을 담은 "한겨울, 브라이스"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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