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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an 16. 2020

미국의 국립공원, 브라이스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에 폭설이 내렸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니 정신이 산만해졌는지 공원 첫 번째 뷰포인트를 지나쳤다. 사방을 둘러봐도 하얀 눈밭이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잘 구분이 가질 않는다. 그동안 몇 번 다녀가면서 이번만큼 눈이 많은 적은 없었다.  눈 내린 브라이스 국립공원*이 처음은 아닌데도 이 정도로 눈 쌓인 풍경은 처음이라서 붉은 후두들은 어떤 모습일지 설레기까지 한다. 


두 번째 뷰포인트인 선셋 포인트로 들어섰다. 주차장이 북적거린다. 빈틈이 없이 차들로 가득 찼다. 사람이 적을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눈이 내리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눈 쌓인 붉은 후두들의 천국이 아름답다는 말이겠지. 겨우 차를 대고 부리나케 전망대에 올랐다. 


"....!"


표현할 말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사실 그때는 아무런 말 없이 지켜만 봤는데, 글로 옮기려니 표현의 한계를 느낀다. 이미 내린 눈만으로도 붉은빛이 간간히 새어 나올 만큼 가득 덮었는데, 함박눈이 펄펄 날리고, 얼핏 얼핏 높직한 후두를 가렸다 보였다를 거듭하는 안개까지 겹치니 세상 어디에서 이런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다. 기온은 차츰 낮아지고, 바람은 더 거세진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번져오는 붉은빛, 후두들의 모습이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나바호 루프 트레일(Navajo Loop Trail)


많은 눈이 내렸는데도 트레일이 아직 열려있었다. 눈이 너무 많아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내려갔다 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그렇다면 한번 다녀오는 것이 눈에 대한 예의겠지?"


이럴 때 쓰려고 준비해 간 크램폰을 장착하고, 비니에 장갑까지 단단히 준비하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은 완만하게 내리막이다.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의 트레일은 모두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온다. 공원이 산 위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경로를 개설했는데, 보통 등산의 개념과는 다르다. 등산은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기 때문에 올라갈 때 힘이 들어도 내려올 때는 적은 힘으로도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내려갔다 올라오는 경우는 힘을 반대로 써야 하기 때문에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 특히나 더운 계절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내려갈 때 수월하다고 생각 없이 내려갔다가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등산 능력을 가늠해서 걸어야 한다. 


어느 만큼 내려가니 스위치 백이 나왔는데, 그즈음에서 선글라스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주변이 온통 눈이다 보니 어쩌다 해가 잠깐씩 머리를 내밀기라도 하면 눈이 부셔서 앞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화이트 아웃(White Out)'현상까지 나타나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다. 경치가 아무리 좋고, 내리는 눈이 아무리 환상적이라고 할지라도 잠시 멈췄다가 시야가 확보된 다음에 다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스위치백을 오가다 보면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날리는 눈발에 카메라가 젖어 대놓고 사진을 찍기가 어렵다. 방수가 잘 되는지도 모르겠고, 설사 된다고 해도 만일의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목에 두른 보호대로 둘둘 말아 눈을 피했다. 습설이라 그런지 눈이 많은데도 길이 미끄럽지는 않다. 크램폰을 착용했기 때문에 조금 미끄러워도 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가만히 보니 다른 사람들은 크램폰 없이 맨신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트레일이 채 일 마일이 되지 않아서 금세 바닥에 도착했다. 원래 이 코스는 루프 트레일이라서 한 바퀴 돌게 되어있지만, 이날은 길이 막혀있어 내려온 길로 되돌아 올라가야 한다. 공원의 아래쪽은 위에서 보는 것과 많이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붉은 빛깔 후두들만 모여있는 것 같지만, 막상 아래로 내려오면 상당량의 나무가 있다. 주로 침엽수들이지만, 눈 쌓인 침엽수와 흰 모자를 뒤집어쓴 붉은 후두들, 그리고 바닥에 쌓여 높아가는 눈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그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함박눈 가르며 고요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마치 그들에게로 스미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눈사람, 그리고 나무들


자, 이제 올라가야 한다. 지금부터가 진짜 등산이다. 내려오면서 체력소모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오르막은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스위치백을 돌아 돌아 눈발이 앞을 가리는 길을 뚫고 몇 구비 돌다 보니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잠시 멈추고 긴 숨을 몰아쉰다. '아무리 눈이 있다고 해도 일 마일도 되지 않는 거리를 이렇게 힘들어하다니 그동안 산을 너무 멀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다가 이내 더 짙어지는 하늘을 보며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 바라보니 내려갈 때와는 감흥이 다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기에 앞서서 미지의 대상에 대해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과 경험한 후에 드는 생각에는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가 보다.  


무슨 일이야?


트레일을 마치고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려 했지만, 그다음부터 공원이 폐쇄되었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한동안 막힌 길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올라올 때 들리지 못한 선라이즈 포인트를 들러보기로 했다. 사람 일이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가 보다. 누군가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선라이즈 포인트는 잠시 들러 주변 전망을 살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이어지는 퀸즈 가든 트레일도 막혔고, 달리 할 만한 것도 없을뿐더러 눈이 너무 많은 데다 강한 바람에 안개도 짙어 전망이 그다지 좋지도 않기도 했다. 


선라이즈 포인트에서 보는 브라이스 캐니언


이어지는 폭설!


산간지역의 해는 서둘러지고, 기온은 급히 떨어진다. 해가 기우는가 싶더니 금세 어둑어둑해지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까지 몰아치니 낮에 느꼈던 추위와는 댈 것도 아니다. 서둘러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려다가 낮에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길을 지나는데 어떤 차가 앞유리 와이퍼를 세워놓은 채로 주차해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 당시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눈이 많이 오면 앞유리에 쌓인 눈을 떨어내고 와이퍼를 작동할 때 얼어있으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눈 오는 양이 심상치 않아 혹시 몰라 와이퍼를 세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해가 떴을까?"


시계를 보니 해가 뜰 시간은 지났는데, 창밖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커튼을 제쳤다.  어제 낮부터 내리던 눈이 아침이 밝았는데 여전히 내리고 있다. 하늘에는 해가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을 보니, 눈은 계속 내릴 것 같다. 평생 봐왔던 눈 보다 이날 본 눈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을 만큼 눈이 내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눈을 본적도 밟아본 적도 없었다. 어느 산에 몇십 센티미터의 눈이 왔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것이 어느 정도일까 피부에 와 닿는다. 


'아... 저 눈을 어떻게 치우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생각에 우선 카메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이곳저곳 스케치하듯 사진을 찍으며 살펴보니 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아침을 챙겨 먹고 차에 실어놓은 삽을 이용해 겉에 쌓인 눈을 대략 치우고, 앞유리는 와이퍼를 작동해보았다. 그러나 움직이기는 하는데, 구멍이 얼었는지 물은 나오지 않는다. 삽으로 설렁설렁 눈을 치우고 앞 유리와 양 옆 유리의 눈만 말끔하게 정리하고 일단 체크아웃을 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이다. 혹시 몰라 와이퍼를 세워놓았다.


밤새 내린 폭설에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쌓였다. 브라이스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아침나절에 다시 한번 다녀올 생각으로 공원으로 향했지만, 공원은 이미 폐쇄되고 비지터 센터 다음부터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여행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어떤 일은 굉장히 곤란한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엔자 보레고 주립공원에서 당한 일이 그런 경우다. 공원 인근에 있는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그만 화장실에 전화기를 두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돌아가 보았지만, 전화기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참 난감했는데, 경찰에 신고하고 구글을 통해 전화기 리세트 하는 등의 조치를 했지만, 전화기를 찾지는 못했다.  


많은 경우는 여행의 추억으로 간직할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제 겪은 일이며, 오늘 겪은 공원 완전 폐쇄며, 많은 일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삶을 풍성하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눈은 어제보다 훨씬 많은데도 제설도 어제보다 낫다.


*눈이 좀 적게 내린 브라이스 국립공원이 궁금하다면 여기를 보세요. 



>>>다음 글은 유타의 아름다운 도로 12번 하이웨이의 설경을 담은 이야기 "하얀 풍경화"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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