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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an 30. 2020

새로운 삶의 시작, 여행

여행의 이유


"눈이 있네!"

"이게 얼마 만에 만져보는 눈이야?"

"한 십 년도 더 된 것 같아..."


미국 이민 와서 십여 년이 지난 몇 년 전 겨울, 어느 시골 마을에서 눈을 밟았다. 

고국에서 밟아본 뒤로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눈을 밟아보고 만져보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랬다!

엘에이는 눈이 내리지 않는 마을이다. 겨울에도 영상 1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눈 대신 비가 내린다. 그렇다고 눈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엘에이를 둘러싼 엔젤레스 국유림의 고지대에는 매년 겨울이면 눈이 쌓인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내린다.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오랜 세월 그곳엘 갈 수 없었다. 겨울마다 비가 내리는 엘에이를 지나다니면서 비가 개고 나면 눈 쌓인 뒷산을 보면서도 속으로만 '어, 눈이 내렸네' 했을 뿐, 차마 그곳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세월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국 와서 밟아본 첫눈은 굉장히 충격이었다.


산에는 매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사건은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매일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을 뜨고 지낸 세월이 남긴 처절한 흔적이 보였다. 낯선 땅이라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 보지만, 물선 곳에 적응하느라 그랬다고 둘러대 보지만, 먹고살아야 했다고 변명해 보지만, 붉게 물든 세월의 흔적을 보니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았다. 그동안의 삶을 변화시킬 필요가 생겼다. 우선 주말은 쉬면서 개인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주말 등산이다. 주말에 일을 하지 않고 등산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삶 보다 훨씬 여유가 생겼다. 그에 더해서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겨울마다 눈을 만나는 것은 물론 철마다 바꿔 피는 꽃들이 그렇게 많은지도 알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산에는 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이 때야 알게 됐다. 때 마침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생활은 조금 더 생기를 찾아갔다. 


등산을 하면서부터는 매년 겨울마다 눈산을 오를 수 있었다.


한 일 년을 그렇게 하고 났는데, 더 이상 주말마다 등산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그런데도 주말만 되면 몸이 가만있질 못했다. 그렇다고 주말에 다시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두어 달 그렇게 지내는데 안 되겠다 싶었다. 여행을 좀 더 자주 다녀보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짧은 트레일은 하겠지만, 본격적인 등산은 아니므로 별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여행을 다녀보니 등산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여행은 주로 자연으로만 다녔다. 국립공원을 비롯해서 주립공원이나 그 주변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녔고, 여행지도 처음엔 캘리포니아를 주로 다니다 조금씩 범위를 넓혔다


그런데 주중에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만 여행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좀 더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하되, 금요일 밤에 출발하여 일요일 밤에 귀가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좀 더 멀리 다녀올 수 있도록 밤샘 운전도 불사했고, 여행지에 도착해서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일요일 밤늦게 돌아와 짐 정리하고 월요일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 일 년에 두어 번 연휴가 있다. 추수감사절 연휴와 노동절 연휴, 아니면 성탄절 연휴가 있다. 이 때는 3박 4일쯤 쉴 수 있으므로 주말여행으로는 다녀올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여행지를 다녀오는 데 할애했다. 


여행하면서 처음 찾은 자이온 국립공원, 겨울나무들에 취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이렇게 자리 잡은 여행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하기로 한 여행은 그러나 달거리를 하기도 하고, 겹쳐서 가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이것저것 뒤적거리다 보면 마음은 이미 여행길에 있다. 다녀와서는 사진을 정리하고 글로 정돈하다 보면 다시 마음은 머나먼 곳 어디선가 어슬렁거리기 십상이다. 이렇다 보니 여행은 삶의 목적까지는 아니어도 삶을 풍요롭고 다양하게 하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자릴잡았다. 여행을 하면서 주말도 없이 일에 몰두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성큼 옆으로 다가올 뿐만 아니라 자연을 매개로 생각해 볼 것들이 늘어났다. 여행을 시작할 무렵부터 맛들이기 시작한 사진은 여행에서 훨씬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사물을 좀 더 톺아보게 해 줬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습관이 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이래저래 시간이 지날수록 길을 떠나는 것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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