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미 Feb 21. 2020

누가 결혼 안 한다 그랬어

혼인율은 떨어진다는데 왜 여긴 바빠

청첩장 회사에서 일을 한다. 재밌는 경험이다.

일단 청첩장 회사가 그리 많지 않으니, 꽤 흔치 않은 경험이라 흥미로운 편이다.


반 쯤은 원했고, 반 쯤은 성적에 맞춰 전공한 광고홍보 덕택에 졸업 전부터 이런저런 회사 마케팅팀에서 일을 했지만 MD업무는 이 곳이 처음이고, 막연히 짐작하던 MD 업무란 게 진짜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회사에서 내 역할은 MD다.


요즘 같은 때 결혼이 필수냐? 난 안 할 건데! 라며 호기롭게 비혼선언(그 땐 비혼이란 단어도 안 썼다.)같은 걸 했었는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청첩장 회사에 입사해서 '아니 왜 결혼들을 안 한대~? 결혼 좀 하라 그래~ 청첩장 좀 팔게!' 이런 류의 농이나 내뱉는 장사꾼이 되어 있다.


20대 초중반에 호기롭게 내뱉은 '엄마 나 결혼 안 할 거야.' 라는 말은 수명이 짧아 지금까지 유지되진 못했다. 어쩌다 보니(?) 좋은 사람 만나 '엄마 나 이 놈하고는 해도 될 것 같아.' 라면서 폼 안 나게 번복한 지가 얼마 안 됐다.


이제 갓 30대. 회사에선 여전히 아가 취급을 받고 후배들을 만나면 어른인 양 밥을 사는 어설픈 나이가 되자 나처럼 결혼 안 한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한다.

인스타그램에 갑자기 부케 들고 찍은 수줍은 셀카를 올리거나, 카톡 대화명이 '20OO. OO. OO. OO홀 13:00 PM' 이런 류로 바뀐다거나. 아무튼 다양한 루트로 다양한 또래들의 결혼 소식이 전해져 온다.


회사도 회사고, 하는 일도 그렇다 보니 지인이 결혼한다고 하면 청첩장을 소개해 주기도, 친한 지인이면 축하하는 마음으로 지인 할인도 해주고 있는데 이런 일들로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다보면 정~말 누가 결혼 안 하나 싶고, 이러다 나만 혼자 늙어 죽겄소 싶기도 하고, 결혼이 할 만하니까 다들 하나보다 나도 좀 해볼까 싶기도 하고.


무슨 사회적 문제다, 삼포세대다, 결혼 연애 출산 다 포기하는 2030 어쩌냐. 말들 많은데 정작 내 주변은 100명의 90명은 결혼을 한다는 거. 그리고 실제로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회사 망할 걱정은 없을 정도로 청첩장은 잘 팔리고 있다.


막연하게 봄가을에 결혼들 많이 하겠거니 생각했더니 막상 청첩장 가장 잘 팔리는 시기는 설/추석 연휴 직전이더라. 어른들께 돌려야 하고, 사람들 가장 많이 만나는 시기니 이 시기에 많은 초대를 해야 하고, 그 덕택에 회사는 매번 이 시즌마다 반쯤 앓는 소리로 물들곤 한다.


신제품을 만들어 사이트에서 팔고 늘어나는 주문량에 재고가 간당간당해지는 걸 보면서 아 왜 다 이걸로 결혼하지, 다른 거 사지! 하는 MD 비명, 매일 기계처럼 편집해도 아침 출근 때마다 쌓여있는 주문량에 청첩장에 예쁘게 인쇄되게 작업해주는 편집자 비명, '기계처럼'이 아니라 실제로 하루종일 기계 돌려가며 인쇄하시는 생산자 비명, 내 청첩장 언제 옵니까! 하는 성화에 고객 응대하는 CS팀 비명. 애석하게도 그 비명만큼 다음달에는 매출 그래프가 상향 곡선을 그리니 이 또한 아이러니해서 비명 아닌 비명이 나온단 말씀.


아무튼 딱 결혼 생각할 나이 언저리에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또 참 인생이란 뭐고 사람이란 뭘까 싶더라는 것이다. 난 평생 내가 돈 벌어서 멋있는 싱글 할 거다, 하던 패기로웠던(과거형이다) 나조차 평생 혼자 살면 좀 적적하긴 하겠다, 나이 먹고 몸 굳어서 등에 팔이 안 닿으면 효자손 말고 누군가가 두 배는 시원한 사람 손으로 긁어줬음 싶다, 힘들게 일하고 퇴근한 어느 저녁에 친구들 불러 판 벌이는 거나한 술자리 말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향기나는 클렌저로 씻고 나서 정~말 맛있는 안주 한 점에 얼음장처럼 시원한 소주 딱 두어 잔만 마시고 싶다, 아 결혼해야겠다. 생각하는 걸 보니 어쩌면 정말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더라는 것이다.


당연히 혼자 살 수 없고 친구도 있어야 하고 인생의 조언 얻을 선배 하나 쯤 있어야 하고 든든한 술친구도 하나쯤 있으면 좋고 맛있는 거 먹으러 멀리 가고 싶을 때 갑자기 같이 떠날 만만한 친구도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텐데.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 보면 남편이 저걸 다 해결해 주더라 이 말이다. (물론 아직 내 또래는 거의 다 신혼이기 때문에 시기적 함정의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정말 결혼 생각 없다가도 이 사람이랑 하면 해볼만 하겠는데? 인생 좀 심심한데 배팅 콜? 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 말이다.


아무튼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더라는 것이고, 청첩장 장사를 하다보니 마침맞게 친구들의 안부를 들을 수 있어 좋고, 결혼 못할 줄 알았는데 너도 하면 나도 한다! 이 따위 농담을 지껄일 수도 있어 좋고, 몇 푼 안 되는 돈이라도 할인쿠폰 척 선물하고 어깨뽕 빵빵하게 잘난 척도 해볼 수 있으니 아무튼 여러 모로 재미있는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청첩장 환불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