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가혹한 피레네 산맥
안개로 뒤덮인 낯선 새벽길. 날 두려움에 내몰았던 스페인 초등학교 선생님 '카탈리'(정작 본인은 모르겠지만)와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다. 그녀는 방학을 맞이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난 퇴사 선언으로 얻은 귀한 시간인데, 휴가가 긴 직업은 이럴 때 제일 부럽다.
한참을 수다 떨다 적당한 타이밍에 정적이 찾아왔다. 예전 같으면 어색함에 못 이겨 시답잖은 말들로 분위기를 바꾸려 했을 텐데, 나이를 먹으니 그런 에너지조차 무의미 하다 느껴진다. 우리의 BGM은 발자국 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아침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
고요함이 길어질 수 록 키 차이부터 남달랐던 카탈리와 나의 속도는 점점 벌어졌다. 또 보자는 인사와 함께 그녀는 저 멀찌감치 앞서 있다. 아무래도 카탈리는 나와 속도를 맞춰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따라 걷기엔 짧고 소중한 내 다리.
그렇게 한 시간을 홀로 걸었을 즘, 때 마침 까미노의 첫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영광의 일출이다.
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서투른 언어로 부탁해 사진 한장을 얻어냈다. 2023년 7월 18일 6시 43분. 귀한 첫 까미노 일출과 나. 대체 이게 뭐라고 내게 이렇게나 클까.
사진은 모든 것들을 담지 못하지만, 그때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건지, 지도를 보는 시간이 점점 잦아질 즘 첫 쉼터 '오리손 산장'에 도착했다. 정보에 따르면 이곳은 산 중턱에 있는 순례길의 첫 알베르게다. 혹독하다는 피레네 산맥을 두 번에 나눠 가기 적당한 코스라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만큼 원하는 날짜에 예약을 하기란 쉽지 않다고.(3개월 전부터 마감이라는 소리가 있다.) 내겐 큰 의미가 없어 쉬어가기로만 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벤치에 앉아 배낭 한켠에 자리 잡은 소중한 식량들을 꺼냈다. 멋들어진 경관을 보며 먹는 아침은 그게 뭐든지 간에 최고의 끼니가 된다. 멍 때리기 좋은 명당. 숨을 쉴만하니 사진 찍어주던 까미노 친구도 곧장 옆 테이블에 도착했다.
"Hey~ Everything is ok?"
"Yes, I'm Good. And you?"
"Me too, I'm Good."
오르막 길밖에 없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으니 힘들다고 말해야 했으나, 당장은 영어를 구사할 여력도 낼 수 없어 내 대답은 모든게 다 괜찮아야만 했다. 부리나케 다시 걸으러 나섰다.
"I'm going to go. See you again. Buen Camino~!"
고개 숙일 틈 없이 계속 되는 오르막 길을 두어시간 걸었을까. 신경 밖에 있던 가방이 슬슬 무겁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비싸게 주고 산 고어텍스 등산화는 장시간 앞에서 제 값을 하지 못하는 것 같고, 당장 절실한 건 한시진 전에 비워낸 이온음료와 당. 생장 사무실에서 나눠 준 지도를 꺼내 보면 이쯤 푸드 트럭이 나와야 하는데 보일 생각을 않는다. 처음 경험한 갈증과 어지럼증이 자꾸만 다리에 힘을 빼고있다. 당찼던 걸음이 스틱 없인 지탱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놓였고,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는 도저히 걸을 용기가 없어보였다. 내가 그린 산티아고 길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웃기게도 그 때 떠오른 내 주특기 호흡명상. 눈을 질끈 감고 온 힘을 다해 산맥 중턱의 공기를 몸 안으로 빨아들였다. 최대한 크게 들이마시고 잠시 멈춘 후 일정한 속도로 내쉬고. 정돈되지 않은 호흡을 서서히 보듬어줬다.
그렇게 얼마나 호흡을 했을까. 신기하게 다시 걷기가 됐다.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더니 미비했던 속도도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와중에 높고 푸른 무색한 피레네 산맥.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는 양들과 말의 응원을 받으며 호기로운 걸음을 내딛었다.
머지 않아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종교 없는 나는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몇수십번 전했는지 모른다. 망설임 없이 무작정 바나나와 물을 집어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바나나가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했나, 밍밍하다 여겼던 이온음료가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새삼 바르게 채우는 진가를 깨달았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머릿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계산했던 기억이 휴대폰 사진첩에 고스란히, 그것도 크레덴셜 위 세요와 함께 적나라히 찍혀 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찍었지? 극한 상황에 처할 수록 평소 습관들은 서스럼없이 나온다.
그나저나 출발 한지 4시간이나 흘렀는데 반도 못 온 것 실화인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끊임없는 오르막 길에 대한 생각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힘든 감각도 사라져 갔다. 이번에 내 앞을 막는 건 거센 바람. 산 넘어 산이다. 당시 고작 48kg의 몸에게 주어진 무거운 가방과의 버티기 시전은 내 인생 생명의 위태로운 순간 Top3에 꼽힌다. 그저 바람이라 하기엔 태풍급으로 강력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저기 보이는 멋진 경치들 틈 사이에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리. 되돌아 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어 또 다시 멈췄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는 돌이다.
고군분투 끝에 각성하며 걷다 보니 다시 만난 노란 화살표. 이정표만으로 조금은 살 것 같았다. 평지를 계속 걸어 나아간다. 내 삶도 이 길처럼 평탄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함께 걷덛 순례자들과도 방금 전의 고난과 역경의 길을 나누며 허심탄회한 추억거리로 만들었다.
이내 다시 만난 고행의 길, 오르막 길보다 더 무서운 내리막이 시작된다. 대체 이 산은 뭘까? 경사는 상상 이상으로 가파르고 험난해 보였다. 자칫 헛발 딛었다가는 10kg 배낭과 함께 저 세상길이겠구나. 호흡으로 완성된 발걸음으로 더 천천히 걸었다. 겁내며 속도를 낼 생각도 못하고 2시간 만에 평지를 봤다.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 경험 한 고난의 길. 허무하게도 이 모든 고통들은 경치 하나로 별개 아닌 게 된다.
지도에 보이는 숙소와 나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이상하게 이 길이 더 길게 느껴지는 마법 같은 현상을 경험한다. 나는 눈 앞에 목표가 보이면 참을성이 사라지는 것 같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 그렇게 오후 1시 13분, 정확히 7시간 53분 만에 첫 길의 종지부를 찍었다.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은 들어가기 전(오후 2시 오픈) 마련된 쉼터에 앉아 아픈 곳이 없는지, 컨디션이 어떤지 서로의 안부를 살피고 있다. 대부분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오다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는 순례자도 있었고, 너무 일찍 도착해 자고 있는 이도 있었다. 재밌는 건, 모두들 힘들다 우는 소리였지만 입은 웃고 있다.
프랑스 길을 선택했다면 꼭 걸어야 하는 피레네 산맥은 '가장 아름답지만 그만큼 제일 힘든 길'이라 한다. 해발 약 950m. 우리나라의 높은 산이라 불리는 한라산(1950m), 설악산(1700m)도 거뜬히 다녀온 몸뚱인데 그보다 더 한 힘든 여정이었다. 돌아보니 26km를 10kg의 가방과 함께 걸어내야 하는 무자비 했던 길이었지. 체력이 꽤나 좋다고 믿어 온 내 고정관념을 깨 준 고마운 길이다. 이제부터 보다 수월하다 생각하니 더 잘 걸어 볼 용기가 났다.
앞으로 어떤 길들이 내게 올까. 알아도 몰라도 어차피 해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걱정은 걱정만 만들 뿐, 어떤 형태로든 내게 와 느끼는 건 똑같지. 멋모르고 시작한 게 오히려 득이 된 첫 길. 산맥 하나를 건너왔을 뿐인데 뭐든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보인다. 앞으로의 길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