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워밍 업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 왜인지 이 길에선 시작부터 힘을 빼고 싶었다. 많은 정보는 유용하나 내 선택들에 혼돈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산티아고의 기본 정보만 알아가기로 했다. 꼭 필요한 것들과 구글 지도, 걸은 거리를 측정해 줄 어플정도로 충분하다 여겼다. 계획이 취미인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환경이 아닌 스스로에 집중하는 즉흥적인 여행자가 되어보기로 한다. 어쩌면 이 굳건한 무책임 속에서 자신도 모를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설렘과 함께.
순례길에 알면 좋을 간단 용어들을 정리해 보자면.(저자가 걷다가 알게 된 것들)
크레덴셜(credential) : 순례자 여권이라고도 불린다. 걸으며 이곳에 세요를 받고 최종적으로 완주증을 받을 수 있는 증명서인 셈. 이를 받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100km 구간부터 인정을 해준다. 다만, 이 구간은 하루에 꼭 2개의 세요를 받아야 하는 조건이다.
* 발급하는 곳은 순례길의 시작 마을, 걷는 구간의 큰 도시들의 성당 등 자세한 사항은 커뮤니티를 이용하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발급 비용은 2유로.(23년 여름 기준)
세요(seyo) : 크레덴셜에 받는 도장. 묵는 알베르게, 바르, 성당, 마을의 마켓 혹은 걷다 만나는 도네이션 소품샵 등등 에서 받을 수 있다. 모양과 색감 질감 등이 다양해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도장들로 채워진 크레덴셜로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알베르게(Alberge) :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이다. 일반 숙소보다 약 반정도 저렴하고 일반 여행자는 되도록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알베르게는 공립(순례자 협회에 서 지정한 숙소)과 일반이 있는데, 공립의 경우 선착순이 대부분이고, 건물 연식이 천차만별이라 위생에 신경 쓰는 순례자라면 미리 알고 가는 게 좋다. 더해서 도네이션 알베르게도 있다. 말 그대로 내가 누리고 만족한 만큼 퇴실 시 기부를 한다.
부엔까미노(buen camino) : 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이라 한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가벼운 인사지만 이 의미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에게 어쩌면 각기 다르게 와닿을지도 모른다. 단지 길(road)이 아닌 우리가 사는 삶의 길(life)의 의미라면 언제 들어도 좋을 행복한 인사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무작정 기차 길에 오른 대범했던 나는 'god-길' 노래를 무한 반복으로 들었다. 그 어느때보다 가사 한줌한줌이 귀에 깊숙히 박힌다.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 날만큼은 내가 저 주옥같은 내용의 주인공이다. 그냥 걸으러 간다고는 했으나 이 노래 하나로 벅찬 마음이 사르르 올라오고야 만다. 나는 얼마나 흔들리고 많은 유혹들에 매혹을 당하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와있는 걸까. 나조차도 모를 일. 재밌고 기이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시작은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라는 프랑스의 작은 소도시이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많은 길 중 초보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랑스 길'이 바로 이곳에서부터다. 유럽의 작은 도시인만큼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품샵들이 옹골지게 나열 돼 있다. 그 사이에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순례자 사무실. 이곳에선 크레덴셜과 걸어야 할 길의 간략한 설명,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발급해준다.
오던 기차 안에서 본 비슷한 또래의 한국 여자분을 다시 만났다. 눈빛으로 인사하던 아까와는 달리 반가움에 인사를 나눈다. 처음 만났지만 왜였을까, 이 길을 함께 걸을 생각에 내적 친밀감이 스멀 올라왔다. 크레덴셜을 발급받을 순번이 길어지는 바람에 우리 둘은 함께 설명을 듣기로 했다. 언어의 장벽에 여전히 겁쟁이인 나로서는 든든함까지 느껴졌다. 흰머리가 매력적인 유럽 할머니는 최소한의 영어 단어로 친절한 눈빛과 함께 차근차근 루트와 주의사항을 전달해 주신다. 듣던 중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까마득한 두려움이 몰려 올 찰나, 크레덴셜 위 첫 세요를 받으며 들은 '너의 길을 잘 만들어 보렴. 부엔까미노'. 이내 긴장으로 얼어있던 마음이 차차 녹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사람 마음가짐이 보는 세상을 쉽게 바꿀 수 있다니.
이곳에 오기 전, 설렘과 밀려오는 벅찬 마음이 나를 지배할 때 만든 책갈피. 친구를 만들자는 목적이 제일 컸다. 부끄러워 주변엔 부엔까미노 책갈피라 했으나 일명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책갈피이다. 최소 발주량 덕분에 버려야 할 무게는 커녕 마음 안정제 무게만 더해졌다. 돌아갈 때 책갈피는 어떤 형태로 남아 있을까.
함께 설명을 들은 첫 까미노 친구에게 첫 책갈피 선물을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놀란 그녀는 순식간에 내 크레덴셜 비용까지 내주셨다. 이러려고 만든 게 아닌데. 친근한 마음에 드린 선물이 되려 부담이 된 건지, 상상력 부자인 나는 별의별 생각에 빠졌다.
드디어 첫 날, 동이 트기도 전 호기로운 마음과 내 여정의 집이라 여기는 배낭을 짊어지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오늘 걸어야 할 길 26km. 처음 접해보는 먼 거리지만 평소 운동러인 나(주 3일 달리기, 주 5일 요가로 다져진 몸)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 10kg에 가까운 가방이 무거운지도 모른 채 마음은 동동 떠 있다.
새벽공기는 상쾌했고, 곧장 보이는 이정표와 불빛을 따라 첫 걷기를 시작했다. 전 날의 여유로움은 없었다. 마을 끄트머리에 다 달았을 즘 가로등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어둠뿐이다. 잠자코 있던 무서움이 또다시 나오는 시점. 이 깜깜함 속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아야 하는데 한국에서 사 온 후레시가 말썽이라 온전히 어둠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발 한발 내딛는 순간들이 공포영화 클라이막스 전 단계에 머물듯 심장이 쫄깃해지고 뒤에선 낯선 이 가 뒤따라 오고 있다. 침착해 연주야.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숨이 멎어가는 긴장감이 흐른다. 심장소리가 뇌까지 들리는 경지에 이르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기 일보 직전. 나에겐 비루하나 스틱이 있다. 내게 몹쓸 짓을 하려는 순간 고작 막대기 따위로 열심히 휘두를 준비가 되어있다.
발걸음이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그때, "올라~" 어이없게 너무도 청량한 여자 목소리였다. 뒤이어 "부엔까미노".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짙어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도의 평안함이 찾아왔다. 이렇게 길 위에서의 첫인사는 꽤 오래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