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큰 결심은 생각보다 순식간이다. 이유는 너무도 선명하고 확고하지만 타이밍은 그걸 잘 모른다.
따사로운 오월의 어느 날, 붐비는 지하철 출근길에 그동안 참아왔던 울렁임이 몰려왔다. 7년 반 동안 내 청춘을 함께 했던 회사를 드디어 떠날 용기가 생긴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키보드 소리로 가득한 사무실은 퇴사 선언 타이밍을 쉽사리 주지 않는다. 우리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E성향의 사람을 I로 만드는 적막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I가 76%나 차지하고 있는(믿거나 말거나 검사 통계가 그렇게 나왔다.) 나로서는 최적의 회사다. 그렇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손끝으로 메세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에라 모르겠다 지르자.
"선배 이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주제 중요도랑 예상 시간은?"
나 지금 로보트랑 대화하나? 그나저나 중요도라. 나와 선배의 중요한 기준은 다를 수 도 있을텐데 괜히 망설여졌다. 이 소심한 마음들이 회사를 떠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조급한 마음에 입을 뗐다.
"저 산티아고 가려고요."
"휴가? 그래 다녀와~"
"아니요. 퇴사요"
그토록 지켜내고 싶었던 것들을 놓기까지 고작 5분도 걸리지 않았다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선배와 곧장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고이다 못해 지하 암반수가 되어버린 첫 직원의 퇴사 선언에 선배도 얼떨떨했겠지. 총명한 그는 짧은 새에 나와 회사 사이에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것이다. 아무래도 홧김에 퇴사하는 거라 여겼나 보다. 돈은 많이 모아뒀냐부터 그만두지 않는 선에서 기간을 조정해 보는 게 어떨지, 앞으로 어떤 커리어를 쌓아갈지 등등 감사하게 내 입장을 고려해 준 제안도 했지만, 여러 방안의 흔들림 속에서 이내 곧 중심을 잡아 내 맘은 더욱 확고해져갔다.
이 결심은 덧없이 깔끔해 보이지만 7년 반을 정리해야 하는 수순이 남아있다. 제일 어려운 건 마음 정리겠지. 헤어짐은 슬프지만 어떤 형태로는 설레고 아름답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간다고 하면 종교적 의미냐, 자아 성찰하러 가냐 등등 재밌는 질문들이 많이 던져진다. 나조차도 모를 일이었다. 왜 가려고 하는 건지. 불과 올해 계획을 세울 때에도 산티아고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그 안에 들어가게 됐다. 결정의 합리적인 이유를 굳이 찾자면 아마 내년에 2세 계획 때문에. 주변의 경험담엔 아이가 있는 삶은 자신보다 아이가 우선순위라 했다. 단정짓는 걸 극도로 꺼려하지만 내 무의식 속 본능은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혼자 할 수 있을 때 후회 않게 뭐라도 해봐야지.
발리에서 요가하며 한달살이를 해볼까, 유럽 여행을 길게 다녀와 볼까, 아니다 전국일주를 해보는게 좋겠어. 많은 선택지가 눈 앞에 놓여 있다. 내년에 아이를 가지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겠구나. 적절한 타이밍에 맘처럼 와주는게 아니니 여유를 부리면 안되겠다. 계산을 무척 싫어하는 내 머릿 속은 이미 1년 후의 우리 삶을 그려가고 있다. 오로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 졌다.
위의 선택지들엔 아이와 함께여도 제법 해볼 법 한 그림이 그려진다. 허나 산티아고만은 하루 20-30km를 걸어내야 하는 고행 길과 예상 못할 변수가 가장 많으니 별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절실히 가고싶은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을 떠올리고 걷고 있는 나를 상상하면 그다지 설레는 마음 보다 되려 두려움이 크게 번져 있었다. 머리로는 가야겠고, 진짜 마음은 무섭고. 대체 난 어디쯤 서있는 거야?
"준영아, 나 산티아고 다녀와도 괜찮겠어?"
"응~ 다녀올 수 있을 때 빨리 갔다 와."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
얼떨결에 정해버린 산티아고는 아마 내 인생의 많은 것을 바꿔 놓겠지. 이왕 가기로 한 거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무의식 속의 내가 원했을 거라고 치부하며. 그래 어쩌면 이게 진짜 내 마음일거야.
여러분 저 산티아고 가요!